누군가 ‘뜨면’ ‘가라앉혀야’ 속이 편한 문화. 한 사람이 도드라지면 많은 사람이 초조해지고 불안해지는 사회.
H대병원의 ‘관절 박사’ 김모 교수(52)는 교수사회의 헐뜯기 문화에 넌더리가 나서 퇴직을 결심했다. 그는 환자가 3, 4년을 기다려야 진료받을 수 있을 정도의 명의이지만 ‘뜨고 나서’ 10여년 동안 ‘치료제로 마약을 쓴다’는 등 황당한 루머에 시달려왔다. 투서는 그가 재직하는 대학의 총장실은 물론이고 검찰과 청와대까지 ‘답지’했다. 출처는 뻔한 곳, 바로 주위였다.
서울대 정신과 권준수 교수는 “헐뜯기문화는 내가 처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서 오며 남을 인정하지 않는 고질적 풍토에 경쟁 심화가 합쳐져 심화되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우리 사회를 ‘불안장애 중 평등강박장애’로 진단했다.
▼글 쓰는 순서▼ |
- '홀로서기 기피' - 외모 만능주의 - 집단 히스테리 - 두얼굴의 '인격' - 평등 지상주의 |
세계를 내다보고 뛰어야 할 ‘뜬 사람’은 늘 ‘발목’을 조심해야 한다. 잘 나가는 대기업 임원은 특히 조심스럽다.
최근 B사의 최모 이사(50)는 몸살로 하루 결근한 뒤 출근했다가 비서 등으로부터 “건강이 악화돼 퇴사한다는데 사실이냐”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C사에선 지난해 15년 근속자에게 회사발전안을 받은 결과 80% 이상이 “○○가 회사를 말아먹고 있다”는 비방 일색이었다.
개인의 평등강박장애는 사회적으로는 상류층에 대한 맹목적 반감으로도 나타난다. 한국의 상류층 중 일부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고 상당수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외면하고 있는 것도 사실. 그러나 남다른 노력과 성실함으로 일가를 이룬 이들도 도매금으로 싸잡아 비난하는 분위기다.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는 “‘위화감’에 유난히 신경쓰고 ‘분수를 알라’는 말이 모욕적이고 서러움으로 연결되는 나라는 한국뿐인 것 같다”면서 “한국인의 심성에는 계층 소득 성별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고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으며 결국은 모두에게 손해가 되는 ‘하향평준화’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연세대 김우식 총장이 기부금 입학제를 도입하겠다고 했을 때에도 처음 나온 반대 논거는 ‘위화감 조성 우려’였다. 등록금 탓에 매년 총학생회가 총장실을 점거하고 있으니 기부금 입학제가 실제 가난한 학생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지를 냉철하게 계산해 볼 엄두도 내지 않는다. 사적 의료보험, 우열반 등도 ‘위화감의 벽’을 넘지 못한다.
정신의학자들은 ‘위화감’의 바탕엔 ‘우리는 단일민족’ ‘같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말한다.
맹목적 평등 존중 사고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불이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98년 경제위기 때 일부 언론과 국민은 상류층의 소비행태를 위화감 조성을 이유로 싸잡아 비난했고 결국 내수 침체를 깊게 해서 모두가 피해를 보았다.
그런 점에서 한화유통 경리팀 남규선 과장(38)은 특이하다. 남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배우기 위해 애쓰는 그는 초등학교 2학년 아들에게도 친구에게 배운 것을 일기로 쓰라고 가르친다. 남과장은 “사촌이 논을 샀을 때 배아파하고 욕하면 함께 손해이지만 축하하면 떡이라도 얻어먹는다”고 말했다.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을 원하는 것은 전체주의적 사고로 민주사회와 자본주의 발전의 적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만 개인과 사회의 정신이 건전해지며 모두에게 활력소가 된다. 하향평준화냐, 모두가 조금씩 올라갈 것이냐를 선택해야 한다.”(이시형 박사)
<특별취재팀>
오명철차장(팀장)
이성주 이호갑 이은우 김준석기자(이상 이슈부)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