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을 달려온 지하철은 이제 단순히 ‘시민의 발’이 아니다.
역사(驛舍)는 시민들의 생활공간이 됐고 예술무대로 이용된다. 그 과정에서 노선마다 ‘얼굴’이 생겼고 문학과 예술의 소재로 부상하기도 했다. 물론 그늘도 있다. 지하철을 타려면 우리는 평균 13분을 걸어야 하고 기나긴 환승통로는 차라리 고통이다.
우리 인생을 싣고 달리는 지하철의 모든 것을 살펴본다
새해를 이틀 앞둔 12월29일 오전8시 독산역을 지나는 1호선 전동차 안. 출입구 바로 옆좌석의 몽골여인이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한창 대화중이다. 수군대는 동남아 사람들도 눈에 띈다. 이들의 바로 앞에선 20대 아가씨들이 연신 깔깔댄다. 지하철 1호선은 이렇게 남녀노소는 물론 외국인까지 다양한 승객들로 그득하다.
같은 시각 2호선 신촌역을 막 출발한 전동차. 발디딜 틈조차 없는 와중에도 모두들 자기 일에 열중이다. 이어폰으로 뭔가 골똘히 듣는가 하면 문자채팅하는 대학생, 소설 읽는 아가씨 등 젊은이들 특유의 생동감이 묻어난다.
지하철에도 ‘얼굴’이 있다. 우리가 의식하건 부지불식 간에 넘어가건 각 노선에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고 자기만의 색깔이 있다.
세월의 더께가 쌓인 때문일까. 1호선엔 모든 인간 군상의 표정이 겹겹이 투영된다. 샐러리맨으로부터 학생 노인 ‘아줌마’ 등 한반도에 거주하는 모든 부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짬뽕’ 또는 ‘칵테일’노선으로 불리는 이유를 알 만하다.
반면 2호선은 ‘젊은이 노선’이다. 주변에 서울대를 비롯해 연세 서강 한양 이화 등 10여개 대학이 포진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직장인이라도 30대 초반이 고작. 이들은 대부분 벤처회사가 밀집한 테헤란로에서 타고 내린다.
3호선은 ‘중산층 노선’. 이 노선은 압구정동 신사동 등 강남의 노른자위 땅을 관통해 분당과 일산의 중산층 베드타운으로 연결된다. 시설도 비교적 고급스럽고 타고 내릴 때 뛰거나 앞지르기가 거의 없다.
그런가 하면 4호선 승객들은 언제나 들떠 보인다. 주변의 서울랜드와 경마장 때문일까. 출퇴근시간이 지나도 명동, 남대문, 동대문시장 등으로 향하는 장사꾼과 쇼핑객들로 늘 왁자지껄하다.
통한지 15년이 넘은 1∼4호선은 그렇다 치더라도 95년 이후 선뵌 2기 지하철 역시 나름대로 자기 얼굴이 있고 자기 냄새가 있다.
강서와 강동을 수평으로 잇는 5호선은 양쪽 주민들의 유일한 도심진출로. 김포공항과도 연결돼 2기 지하철 가운데 승객이 가장 많다. 지난해말 개통된 6호선은 아직 전동차별 승객이 20∼30명선이지만 공사중인 이태원 한강진 등 외국인 생활지역까지 개통되면 틀림없이 외국인을 가장 많이 만나는 노선이 될 것이다.
장암과 온수를 잇는 7호선은 지하철 사각지대였던 서울 북동부와 남서부에 지하철시대를 열어준 고마운 노선. 청담동은 이 노선 덕분에 압구정동 신사동에 이어 새 유흥가로 떠올랐다. 일명 ‘강동 마을버스’로 불리는 암사와 모란 사이의 8호선은 성남과 분당지역 주민들의 도심 진출용이기도 하다.
이렇듯 노선마다 ‘얼굴’이 다른 것은 승객 특성과 아울러 노선과 역사(驛舍)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승강장의 평균 너비가 5∼6m에 불과한 1호선은 전체적으로 비좁고 노선도 낡아 칙칙하다. 이에 반해 3호선 이후는 8∼10m로 널찍하다.
1기 지하철 95개 지하역사 가운데 냉방이 되는 곳은 28개뿐. 그러나 2기 지하철은 148개 역 모두 냉방처리된다.
편의시설 역시 1호선엔 현장민원실이 한 곳뿐이지만 2기 지하철에는 민원실은 물론 상설공연장까지 곳곳에 있다. 지하철이 ‘문화철’의 별호를 얻은 것도 이 2기 지하철 이후의 얘기다.
이렇게 노선마다 다른 특성을 가장 먼저, 가장 효과적으로 파악한 사람은 누구인가.
남녀노소가 모두 모이는 1호선에선 옷걸이 건전지 등 생필품을 팔고, 2호선에선 초소형 라디오를, 3호선에서는 면도기와 혁대를, 4호선에서는 순간접착제와 선풍기커버를 파는 잡상인들이다. 그들의 ‘눈높이 판매전략’이 경이롭다.
또 한 부류가 있다. 지하철수사대의 형사들이다. 소매치기와 성추행범을 잡기 위해 1호선에선 그저 경찰관 티를 내지 않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2호선에선 대학생, 4호선에선 장사꾼 티를 내지 않는 한 결단코 소득은 없다. 그러나 네티즌들 사이에 ‘지하철 박사’로 통하는 이재원(李載元·23·회사원)씨의 말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3호선에서는 절대 뛰지 않던 승객도 신도림역에만 가면 환승할 때 냅다 뛰는 걸 보면 참 신기해요.”
노선마다 다른 얼굴과 다른 냄새의 지하철, 그것이 우리를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만들어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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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대·민동용기자>orion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