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생필품 공급' 한가닥 위안
5일 오후 5시10분 지하철4호선 동작∼이촌 구간. 스리 버튼 정장 차림의 엄모씨(36)가 양손에 든 007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질펀한 ‘사설’을 늘어놓는다.
“오늘 잘 빠진 ‘강가루표’ 가죽장갑을 갖고 나왔습니다. 100% 가죽이고 겉은 우레탄으로 특수 코팅해 방수도 됩니다. (라이터와 분무기를 차례로 꺼내들고) 이렇게 불에 대도 ‘기스(흠집)’ 하나 없고 물은 닿는 즉시 뚝뚝 떨어지죠. 백화점에서 4만7000원씩 받는 이 제품을 이 자리에서는 ‘세종대왕’ 한 장으로 모십니다. 자, 돈 벌어 가세요.”
반응이 신통치 않자 이 4년차 ‘지하철 상인’은 꼼짝 않는 건너편 승객들에게 “잠깐만요, 물건 충분합니다”라며 바람을 잡는다. 이렇게 10분동안 3장을 팔았다.
“이 장사도 끝물이에요. IMF사태 직전에 시작했는데 그때는 만원을 1000원 쓰듯 했고 아무리 비싸도 만원 이하니까 웬만한 건 다 팔렸죠. 요즘은 5000원 넘으면 힘들어요.”
그래도 한 달에 100만원 정도 챙기는 엄씨는 사정이 나은 편. 요즘 같은 때 엉뚱한 물건 내놓다간 하루 종일 2만∼3만원 벌기도 힘들다. 입심까지 달리는 신참들은 빈손으로 돌아가기 일쑤.
“정말 생활에 필요한 품목 아니면 백전백팹니다. 테이프 10개짜리 ‘추억의 올드 팝송’이나 애들용 찰흙 장난감을 들이밀면 저라도 안 사죠.”
8일 오전 10시반 지하철1호선 시청역 승강장. 지난해 초까지 H사 마케팅팀에서 일하다 이 바닥에 뛰어든 박모씨(여·34)가 물건 꾸러미를 챙기고 있다.
“이번 주는 재수가 좋아야 할텐데….” 7개월 경력의 박씨가 ‘잡상인 단속반’과의 숨바꼭질 끝에 걸려서 3만원짜리 ‘딱지’를 뗀 게 지금까지 10여회.
“뭐 불법이니 어쩔 수 없죠. 처음엔 동생같은 공익근무요원들이 연행하려 하면 상소리까지 해가며 버텼지만 이젠 딱지도 ‘원가’로 치죠.”
이 ‘지하철 유통세계’는 원래 ‘금녀구역’이었지만 요즘은 1∼8호선을 뛰는 전체 200여명의 ‘이동상인’들 가운데 박씨 같은 ‘아줌마’도 꽤 있다. 대개 자식들 때문에 독하게 맘먹고 뛰는 경우다. “‘아는 선배’들 중에 몸이 안좋아도 진통제로 버티며 그날 입금액을 해내는 경우도 봤어요.”
요즘 지하철 물건은 대부분 중국산. 박씨도 이날 중국산 라디오
를 들고 나왔다. ○○유통, ××문화사 등의 간판을 건 동대문시장 유통업체의 사장들이 ‘물건’ 될 만한 걸 봐뒀다가 중국 보따리상을 불러 보름 안에 만들어낸다고. 이들은 대개 현장에서 5년 이상 버텨낸 ‘선배’들이다.
“과거 마케팅 일을 하던 입장에서 이런 물건을 팔려니 처음엔 양심에 찔렸죠.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질은 조금 떨어져도 ‘가짜’는 아니더라고요. 서민들에게 생필품 공급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죠.”
<이승헌기자>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