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과연 국가차원의 지원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법적 근거를 살피고 행정적 절차를 따지는 동안, 지식기반사회로 가는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혈관 하나가 동맥경화증을 앓고 결국은 책방골목의 영세상인들과 열악한 출판환경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출판사들이 십시일반으로 부담을 나누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근대화 혁명으로 급격한 인구이동이 발생했을 때, 책은 가장 성가시고 무거운 이삿짐이었다. 하지만 책이야말로 이 땅의 근대화를 주도하고 근대 민족국가의 응집력을 만들어낸 매개체였다.
하지만 후기 구텐베르크 시대를 선도하고 있는 IT혁명의 물결 속에 조만간 책의 유용성이 없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책을 천대하는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2002년도 문화관광부 예산에 대한 기획예산처의 1차 심의에 따르면 공공도서관 건립비 100억원은 대폭 축소 대상에, 공공도서관 도서자료 구입비 150억원은 전액 삭감 대상에 올라 있다. 비에 젖어 햇볕이 쪼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초라한 책들에서 비가 새는 문화정책을 보는 느낌이다.
IT혁명이 종이책을 대신하는 전자책을 가져다 줄지는 몰라도, 콘텐츠 자체를 생산해주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IT혁명을 통해 열심히 정보의 고속도로를 깔고 있는 동안, 여러 선진국에서는 그 신작로를 통해 흘려보낼 문화콘텐츠의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국경의 문턱은 낮아지고 있지만 문화적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은 더 치열해지고, 혈연을 매개로 한 민족은 약해지고 있을지 몰라도 문화를 매개로 한 민족의 응집력은 오히려 강해지고 있다. 책은 이러한 응집력의 가장 중심에 서 있다.
비에 젖어 정상적인 판매가 어려워진 책들은 국가가 전량 수매해 새로운 민족공동체의 기반을 다지는데 활용하는 것이 문화가 지배하는 21세기를 대비하는 올바른 국가전략이다. 이것은 굳이 새로운 예산을 짜야만 하는 일도 아니다.
기존의 학술진흥재단, 국제교류재단, 재외동포재단, 남북협력기금, 교육부 국제협력사업 등의 일환으로 비에 젖은 책들을 수매하여 북한동포들과 해외동포들, 그리고 농어촌 벽지에 보내자. 비에 젖은 책들을 받겠느냐고? 1999년 연해주로 해외봉사를 떠났던 한신대 학생들이 배낭 속에 라면 대신 넣어가서 우수리스크의 카레이스키들에게 전달했던 헌 책들을 생각하면 그것은 기우이다. 비에 젖은 책들이나마 한글책에 목말라 있는 해외동포들에게는 눈물 젖은 책이 될 것이다.
김명섭(한신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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