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의 대상은 이천전기 사건이다. 1997년 삼성전자는 이천전기를 인수하기로 결정한다. 그 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사태가 터져 재정사정이 악화되자 삼성전자는 이천전기에 지급보증을 하기로 결정한다. 결국 이 회사는 퇴출되고 삼성전자는 투자한 금액 및 지급보증 금액만큼의 손해를 보게 된다.
법원은 최초의 인수 결정에 대해서 이사회에서 충분한 검토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의의무 위반을 선고한다.
판결문은 법관이 결정의 정당성을 인정한 지급보증 행위에 대해서는 절차와 검토시간을 문제삼고 있지 않다. 반면 재무상태가 나쁜 기업을 인수한 결정에 대해서는 불충분한 검토를 이유로 배상을 명하고 있다. 판단의 내용이 어떠했는지에 따라 판결내용이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판결은 결과적으로 경영판단의 내용에 개입하고 있는 셈이다.
절차의 불충분이라는 항목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삼성전자의 이사회는 인수 결정을 위해 8쪽 분량의 ‘중전사업참여방안’이라는 보고서를 검토했으나, 법원은 인수 대상 기업의 상세한 재무구조, 구체적 투자금액 등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검토가 불충분하다는 판결을 내린다. 투자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검토를 할 것인지도 경영판단의 중요한 일부다. 법원은 그런 판단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미국 법원은 경영자의 주의의무 위반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았으나1985년 트랜스유니언(Trans Union) 판결로 중요한 예외가 생긴다. 이 사건에서 델라웨어주 최고법원은 2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내린 결정은 경영판단의 원칙으로 보호할 수 없다고 판결한다.
같은 해 게티 오일(Getty Oil) 사건에서 똑같은 델라웨어주 최고법원이 ‘어느 정도 검토를 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결정도 경영판단의 일부’라고 판결한다. 바로 앞의 판결을 뒤집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랜스 유니온 결정은 미국의 기업계를 흔들어 놓는다. 배상판결에 대한 두려움으로 많은 사외이사들, 그 중에서도 특히 변호사를 겸직하고 있던 사외이사들이 사임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법무법인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회사에 법률전문가를 고용해야 할 것이라고 자신의 고객들에게 조언한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1986년 델라웨어주 의회는 회사의 정관으로 이사의 주의의무 자체를 면제할 수 있도록 회사법을 개정한다. 다른 주들도 배상책임 액수에 한도를 두거나 주의의무의 수준을 회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델라웨어주의 뒤를 따른다.
앞으로 2심, 3심이 더 남아 있다.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경영판단의 원칙에 대한 정확한 판결이 내려지길 희망해 본다.
김정호 자유기업원 부원장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