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관한 우리 사회의 담론은 ‘가족이 만났다’는 사실 하나에 모든 가치를 두고 있다. 그러나 단지 친지 친척들을 ‘만났다’는 사실에서 귀향의 가치를 느낄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그것은 고향에서 함께 산 추억이 있거나 조상을 공유한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결혼해서 또는 타지에서 태어나 1년에 한두 번 ‘낯선 땅’을 찾는 나머지 가족은 상황이 다르다. 그들은 앞으로 그런 ‘가치’를 만들어가야 할 사람들이다. 하지만 차례 지내고 어른들에게 인사하자마자 돌아와야 하는, 지금과 같은 ‘추석 행사’가 그들에게 가족과 고향의 가치를 얼마나 느끼게 해 줄 것인가.
만나는 것만으로 가족의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자주 만나면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는 심리학의 친숙성 원리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여기엔 허점이 있다. 최소한 서로 싫어하거나 그 만남 자체가 부정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싫어하는 가족 친척이 있고,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고, 부엌일을 도맡아야 하는 만남은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실제로 명절 이후 가족의 갈등이 도졌다는 사례가 적지 않다.
휴가나 명절이 연례행사가 아닌 성공적인 만남이 되기 위해선 준비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귀향 귀성길 또는 휴가길의 교통체증에 대비해 가족 구성원 각자가 좋아하는 노래를 CD로 함께 만들고, 차 안에서 다같이 즐길 수 있는 간단한 게임을 준비하는 것 등이다.
‘쿵쿵따’ ‘369’ ‘진실게임’ 같은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대화도 하고, 서로의 속내도 알아볼 수 있다. 부모가 자식의 관점에서 얘기하고, 자식이 부모를 대변하는 식으로 가족 구성원이 서로 역할을 바꿔 대화하는 것도 좋다.
고부 갈등이 있다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부자 갈등이 있다면 아버지와 아들이 한 팀이 되어 서로 의지해야만 이길 수 있는 게임을 준비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단순히 돈을 노리는 고스톱보다 훨씬 즐겁고 유익한 여가활동이 될 것이다.
인간의 행동 원리를 설명하는 학설은 많다. 그중의 하나는 ‘즐거움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한다’는 쾌락의 원리다. 한국 사람이 여가를 잘 즐기지 못하는 것은 쾌락의 원리를 간과한 채 가치와 의미만 강조하기 때문이다.
함께 모였다는 사실 또는 함께 휴가를 갔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식의 말은 그럴듯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가치를 앞세우는 것은 즐거움 찾기에 실패한 데에 따른 자기 합리화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일상생활을 떠난 명절 또는 휴가의 경험은 그것이 내포하는 궁극적인 의미보다 그 내용에 의해 결정된다. 즉 ‘의미가 없는 즐거움’은 여가가 될 수 있지만, ‘즐거움이 없는 의미’는 여가가 될 수 없다. 즐겁지 않았던 명절 경험은 정신건강에 득이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허태균 한국외국어대 교수·사회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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