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들을 데리고 나온 부인은 적어도 10년은 남편과 떨어져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수많은 맹모(孟母)들은 오늘도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 오른다. 우리의 가련한 맹모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들의 무모함 앞에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 돌아와 보니 그들이 조국과 남편을 버려두고 떠나는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만도 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었고, 몇 명의 젊은이들이 또 투신자살을 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차마 죽을 수는 없었지만, 죽고 싶은 심정을 경험한 젊은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그렇게 힘들여 들어간 대학의 현실은 또 어떠한가. 귀국해 보니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서는 나의 동료들과 제자들이 9개월째 데모를 하고 있었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현 재단이 학교 돈 수십억원을 전용 또는 유용했다는 등의 사실이 교육부 감사에서 드러났다. 최근에도 학교 돈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이에 학생 교수 직원들은 재단의 실세인 총장 퇴진을 요구하게 됐고, 견디다 못한 전 총장은 일단 총장 자리에서는 물러났다.
그러나 재단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해결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학생 교수 직원들은 관선이사 파견을 주장하며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학생들은 아예 수업 거부를 결정하고 길거리로 나가 연일 시위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누가 봐도 학교를 정상화하는 길은 일단 관선이사를 파견하는 길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교육인적자원부는 무슨 까닭에서인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애써 외면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학교가 정상화될지 지금으로선 오리무중이다.
지난 1년간 내가 재직했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에서라면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만약 이런 일이 실제 일어난다면 전국이 떠들썩할 것이고, 국회에서는 난리가 날 것이고, 장관 한 사람쯤 권총 자살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가당찮은 문제로 학생들이 엉뚱한 희생을 치르고 있는 대학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노무현 정부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 중 하나다. 우리의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정말이지 이제 ‘새 정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암담한 교육현장을 돌아보면서 나는 씁쓸한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이 정부는 막연한 열정만 있었지 분명한 시각도, 구체적인 아이디어도, 과감한 추진력도 없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금할 수 없다.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는 길거리에서 오늘도 시위 중인 나의 동료들과 제자들의 곤경, 죽음을 부르는 수능에 내몰려야 하는 어린 학생들의 고통, 가족을 이국으로 떠나보낸 기러기 아빠들의 외로움을 생각하며 나는 슬픔에 잠긴다.
하일지 동덕여대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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