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용차 1000만대 시대에 차의 얼굴이랄 수 있는 번호판의 디자인 특성과 미적 중요성을 간과해 결국 막대한 예산만 낭비한 셈이다.
새로 선보인 자동차번호판을 며칠 만에 또 다시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던 ‘갈팡질팡’은 정책결정 과정이 허술해서 빚어진 일이다. 기본적으로 정부가 높아진 국민의 미적 수준에 맞출 만한 심미안도, 지혜도 없다는 것이 문제다.
질이 떨어지는 디자인은 애물단지로 전락할 뿐이다. 조잡한 건축물과 간판은 거리의 미관을 크게 해치는 흉물이 된다. 더구나 번호판은 그 크기는 작지만 차량 특유의 기동성 때문에 이미 ‘움직이는 간판’이나 다름없는, 중대한 시각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해프닝이 빚어진 것은 번호판을 사소하게 여겨 디자인의 기본을 무시했기 때문인지, 또는 ‘번호판쯤이야 정부가 정해준 대로 따르면 그만’이라는 식의 행정 타성 때문인지 도대체 모를 일이다.
자동차번호판의 사용자도 세련된 디자인을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정부 당국은 인식했어야 한다. 문자 그대로 번호판은 차량의 이름표다. 만일 어느 학교가 학생들에게 조잡한 명찰을 가슴에 달고 거리를 활보하라고 한다면 학생들의 참여를 기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문제의 번호판을 보면 우선 숫자가 너무 크고 짜임새가 엉성하다. 식별력을 높이려는 시도는 이해하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단세포적 발상이며, 나무만 보고 숲은 못 본 결과다. 한마디로 번호판 전체의 조화가 결여된 디자인이다.
첫째로 지적할 것은 번호판의 가로 세로 비례에 대한 미적 적절성의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번호판 비례는 가로가 훨씬 긴 형태인 구미 선진국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 것이 좋은지는 의문이다.
둘째, 번호판에 들어 있는 숫자와 문자 등 자체(字體)의 형태와 비례, 자간(字間)이 일목요연하지 않다. 잇새가 벌어진 커다란 앞니들이 줄지어 있는 것처럼 어색하다.
셋째는 번호판의 색상 문제인데 지금의 초록 색상은 그야말로 ‘촌티’의 전형이다. 색상과 색감은 사람의 정서를 좌우하는 시각문화의 키워드다. 같은 초록색이라도 색상 명도 채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특정 도시의 주조색(主調色)을 결정하는 데는 번호판이 ‘작은 거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자동차번호판은 특정지역의 미적 수준의 척도여서 이를 수집해 실내장치에 응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오래 봐도 싫증나지 않는 디자인, 한국의 특성을 반영한 개성 있는 디자인을 창출해 세계 속에 한국의 이미지를 깊이 심을 수 있는 자동차번호판의 등장을 기대한다.
유한태 숙명여대 교수·산업디자인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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