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이런 노랫말 가사로 시작된 아름다운 도시의 꿈은 70, 80년대 아파트 붐, 90년대 신도시 열풍의 기념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축포와 풍선을 날리며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었다. 그러나 현실의 풍경은 간판이고 표지판이고 온통 ‘공사판의 살풍경’같다. 이런 판에 정부가 나서서 ‘살판’을 만들겠다고 하니 참으로 반갑다.
‘아름답다’는 ‘나름답다’가 어원으로 사람이 사람답고 사물이 사물다울 때 쓰는 말이란다. ‘예쁘다’는 말과는 다르다. 선생이 선생답고 선배가 선배다울 때 우리는 그를 ‘아름다운 선생’, ‘아름다운 선배’라 부르는 것이다. 물건으로서 쓰임새가 바르고 편할 때 우리는 그것을 ‘아름다운 의자’, ‘아름다운 집’이라고 부른다. 이 ‘아름다움’의 조건과 요소, 원칙과 정황을 살펴보고 헤아리며 판단하고 결심해서 만드는 전문적인 방법이나 기술이 ‘디자인’이다.
아름다운 간판을 만드는 일은 결국 ‘간판 디자인’의 문제다. 간판 디자인은 예쁜 간판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간판다운 간판을 계획하고 만들고 가꾸는 전문적인 문제 해결방법과 기술이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가 간판의 설치기준과 경관제도를 정하는 과정에서 간과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예쁜 간판’과 ‘아름다운 간판’을 분별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쁨’이란 사람마다 다른 취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애매모호한 것이다. 같은 원색을 보더라도 누구는 기분이 상하고, 누구는 샘솟는 활력을 느낀다. 전국 곳곳의 간판 소유자에게 물어보라. 자기 취향에 따라 ‘예쁜’ 간판을 기대하고 만들었고, 만족하며 걸었다고 말할 것이다.
이번 건교부의 아름다운 간판 설치 추진계획이 또다시 ‘예쁜 간판 만들기’ 캠페인이 되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아름다운 간판의 조건은 ‘관계’다. 모든 사물은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서 그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간판은 도로, 건물, 실내외 장치와의 관계에서의 ‘아름다움’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을 함께 관망하는 관점에서 아름다운 간판을 생각해보자.
아름다운 간판의 또 하나의 원칙은 ‘대화’다. 모든 표식은 사람 사이의 대화를 여는 신호이며 상징이다. 간판은 단순한 상호(商號)장치가 아니라 상호(相互)소통과 대화의 풍경이어야 한다. 차를 끓여내 대화를 시작하듯 또 다른 차원으로 간판을 생각해야 한다.
아름다운 도시의 꿈은 아름다운 간판 만들기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도로표지판, 가로등, 건물 진입로, 정류장, 쓰레기통에 이르기까지 방대하고 복잡한 요소와 정황이 어울려 서로 이야기하는 풍경이 바로 도시의 모습이다. 이 모든 것을 살판나게 만들기 위한 첫걸음, 작지만 소중한 ‘아름다운’ 간판 디자인 계획에 ‘아름다운’ 박수를 보낸다.
권혁수 디자인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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