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홍훈]‘학력란 폐지’만으론 안된다

  • 입력 2004년 12월 12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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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용 대통령인사수석비서관에 따르면 공직자 신규 채용 시 지원서의 학력란을 폐지하는 방안이 정부에서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은 한국사회에서 학벌과 학력에 의한 차별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이다. 그러나 학력란 폐지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 사회에서 학벌과 학력이 갖는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학벌이나 학력에 따라 권력 돈 명예가 차등적으로 분배되고 있다. 이런 사회구조는 고착화된 대학 서열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대학의 서열은 필사적인 입시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학벌구조, 고착화된 대학의 서열, 그리고 중등학교의 입시경쟁은 서로 엇물려 지난 반세기 동안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됐으며, 이로 인해 학벌과 입시경쟁은 불가분의 연결고리를 갖게 됐다.

현재 학벌과 학력에 의한 차별, 대학교육의 공동화, 그리고 초중등교육의 황폐화는 극에 이르렀다. 학벌이나 학연의 문제가 지연이나 혈연을 제치고 한국 사회의 최대 병폐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것이 최근 한 연구보고서에서도 드러났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재수나 삼수, 그리고 편입이나 전과, 조기유학 등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른바 국가 경쟁력의 제고는 요원하다. 말할 나위 없이 사회의 학벌구조로 인해 사교육비 등 자원낭비가 급증하고 있다. 학벌과 학력이 이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자율성, 형평성뿐 아니라 효율성마저 해치고 있다.

입시경쟁이 갖는 절차적 합리성에 매료되거나 입시경쟁을 진정한 의미의 경쟁으로 오인하는 경향이 아직 있다. 그러나 절차적 합리성은 실체적 합리성과 분리될 수 없다. 입시경쟁은 단 한번의 사활을 건 승부로서 그 뒤의 반전을 허용하지 않는 독점적 지위를 낳는다. 더구나 입시경쟁이 안고 있는 사회적 모순은 이제 절차적 합리성을 붕괴시키는 단계에 이르렀다. 최근 드러난 입시부정이 그것이다. 단 한 번에 사회구성원의 지위를 결정해야 하는, 불가능한 사회적 기능을 강요받아 온 기존의 입시제도가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견고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에 학력란 폐지는 당연히 미흡하다. 학력란 폐지는 새로운 제도를 정착시키기보다 의식개혁에 방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제도개혁이 선행 혹은 병행되지 않는 의식개혁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학력란을 폐지하더라도 이면 자료 등을 통해 학벌이나 학력 차별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은 한시적인 인재 할당제나 인재 목표제를 실시하고, 국립대 통합안 등을 통해 대학 평준화나 대학서열의 대폭 완화를 추구하며, 수능시험을 폐지하고 이를 자격고사로 대체하는 것 등이다. 극소수 천재들은 특정 학교가 아니라 여러 학교를 망라하는 별도의 교육 프로그램을 활용해 육성하는 게 바림직하다. 이와 더불어 지배구조 개혁의 차원에서 공직사회, 기업, 그리고 학교의 의사결정체계를 민주화하고 인사 관행을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홍 훈 ‘학벌 없는 사회’ 공동대표·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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