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몇 년 뒤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의 ‘모닝캄’ 기내지에서 우연히 그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놀랍게도 그가 ‘파리의 북한 간첩’이라는 것이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1995년. 주프랑스 대사관에서 그의 전화번호를 주어 연락했더니 바로 달려왔다. 어찌 하룻밤이란 짧은 시간에 30여 년의 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간단한 집안 안부를 나누고 아쉽게 헤어졌다.
지난달 출판된 ‘빠리 망명객 이유진의 삶과 꿈’이라는 그의 자서전은 마치 지난 세월이 어떠했는가를 나에게 말하려 한 것 같았다. 평범한 대학교수 생활을 한 나로서는 짐작도 못할,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 온 그가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그는 양심을 지키며 세상의 간교함을 물리치고 속세의 탁류에 물들지 아니한 정의의 사나이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가난과 싸우면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한 위인이다. 그런 환경에서도 중국의 백가(百家) 사상을 몸으로 터득한 것이 부럽다. 서양 철학의 배경 아래 중국의 고전을 통달한 그는 긴 인류의 역사에서 보면 한 토막에 지나지 않는 근세 서구문명을 비판했고 그 서구문명을 모방하려 애쓰는 한국의 가련한 모습을 조명했다. 한국을 갈라놓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 그 빈약한 이론을 최고의 이념으로 받아들인 한국의 지성이 얼마나 비천한 것인지를 설명했다.
그는 몽양 여운형 선생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 했다. 그러나 나의 눈으로는 그가 몽양보다 몇 배 뛰어난 20세기 후반의 위대한 사상가다.
이광규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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