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진철수]‘세계인 백남준’이 남긴 교훈

  • 입력 2006년 2월 27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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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별세한 백남준의 업적을 기리는 한국 언론의 기사나 논평들을 보면 대체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가 서울 태생으로 고등학교까지 국내에서 졸업한 뒤에 외국으로 나갔으니 ‘한국인으로서의 특성’은 분명히 있다. 그 자신 또한 노후에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의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대목에서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백남준이야말로 한국을 넘어 아시아가 낳은 보기 드문, 뛰어난 세계인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미국 신문은 그가 어느 나라 출신이라거나 어떤 인종이라는 데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 대신 그의 예술 철학과 작품 자체만을 조명하는 글들을 싣고 있다. 예를 들어 1000단어가 넘는 긴 부고 기사를 쓴 뉴욕타임스는 기사의 절반쯤에 가서야 그가 서울 태생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 며칠 후 같은 신문에 실린 추모사도 그의 고매하고 창조적인 예술 경지만을 논했지 한국 출신이라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왜 그랬을까. 그의 예술은 어느 한 나라의 의식구조나 국경을 초월한 더 큰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동양 출신이면서 세계인이고, 진정한 코즈모폴리턴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한 존재였던 것이다.

백남준은 스케일이 큰 예술가였다. 그는 서양 음악을 연구했고 독일과 미국 생활을 통해 서양 문화를 섭취하면서 인류의 장래를 투시하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또 기존 관념을 타파할 생각을 했다. 그의 ‘잘가요, 키플링 씨(Goodbye, Mr. Kipling)’란 작품은 동양과 서양이 융합되기 힘들다는 내용이 담긴 키플링의 시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키플링의 영국 식민지 시대의 인도에 관한 시에는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다. 둘은 결코 조화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등의 구절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외국 출신의 예술가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하는 미국 문화의 장점을 직시해야 한다. 1960년대 이래 미국 사회도 많이 개방되었고, 백남준 같은 인재들이 그러한 개방에 기여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 백남준도 생전에 조언했듯이 글로벌 환경에서 한국 사람들이 세계에 더욱 많이 뛰어들려면 먼저 국내에서부터 출신 도가 어떠니, 출신 학교가 어떠니 하는 작은 울타리들을 마음속에서 지워 나가야 옳을 것이다.

이런 개방적인 마음 자세를 키우려면 젊은이들에게 어떤 인권 의식과 민주적 가치, 그리고 어떤 역사를 가르쳐야 할지부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사 또한 경시해서는 안 될 것이며 감정적인 반미사상도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백남준은 어느 나라 출신이라는 등의 딱지를 붙이기에는 너무 큰 존재였다. 그의 이러한 점이 한국 국민의 도량이 커지고 성숙해지는 데 자극제가 된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울까. 아니 한국도 이미 쇼비니즘으로 스스로를 결박하기에는 너무 성장했다.

진철수 e메일뉴스 ‘USA브리핑 서비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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