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 고검장은 이날 오후 퇴임식에서 장문의 퇴임사를 통해 오늘날 검찰의 위기상황이 신분적 상승을 위해 권력의 주변에서 줄을 서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충실한 시녀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 ‘업보’ 라며 맹성을 촉구했다. 그는 특히 김대중 대통령의 ‘검찰의 잘못 때문에 정부가 피해를 보고 있다’ 는 발언에 대해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그는 정권의 전환기에 일부 정치성 검사들이 비열한 행태를 보인 것이 검찰이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는 비참한 상황이 된 근본 원인이라며 검사 임관시 ‘파사현정’ 의 굳은 의지를 다지던 초심으로 돌아가 어떠한 외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공정한 칼날을 휘둘러야 검찰이 바로 서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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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심 고검장의 퇴임사 전문.
친애하는 검찰가족 여러분!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로서 검찰을 떠납니다.
지난 99년 2월 대구고등검찰청에서 항명아닌 항명이라는 대통령의 면직결정으로 부끄럽지도 아니한데 부끄럽게 검찰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과는 달리 이제 마침내 후배들로부터 영예의 꽃다발을 받으면서 마음의 고향을 떠납니다.
저는 복직하면서 검사 신분보장의 상징적 의미를 위해서라도 일정기간 복무하고 적절한 시기가 오면 미련없이 검찰을 떠나겠다고 약속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떠나면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과연 지금이 적절한 시기인가 의문이고 아쉽기도 합니다. 최근 검찰에 불어닥친 일련의 사태 때문에 그 어느때 나가는 것이 옳은가를 그동안 정말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지금 우리 검찰은 또다시 사상 초유의 위기 속에 진통과 갈등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신뢰와 사랑은 우리를 떠난지 이미 오래 되었고, 오히려 국가·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집단인 것처럼 혹평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이러한 위기상황은 그동안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왔던 ‘업보’ 라는 점을 각성할 때 어느 누구도 탓할 수 없고,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뼈에 사무치도록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인사적 특혜와 권력의 공유 내지 신분적 상승을 위해 권력의 주변에서 무리를 지어 줄을 섰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입맛에 맞게 앞장서 충실한 시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왜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것입니까? 왜 사람들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는 것입니까?
저는 지난 정권 말기에 있었던 한보 및 대통령 아들의 비리사건 당시의 위기상황을 기억합니다. 검찰조직 전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온갖 권력의 외압으로부터 검찰 본연의 위상을 지켜내지 않았습니까?
그때의 위상을 유지·발전시켰더라면 다시 지금과 같은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권의 전환기에 일부 정치성 검사들이 비열한 행태를 보인 결과 정의의 편에 서서 묵묵히 일하는 대다수 검찰 조직원들마저 자괴감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떨어졌고, 검찰은 국민들로부터 사랑은 커녕 철저한 외면을 받고 있어 사면초가에 빠진 비참한 상황이 된 것 아닙니까?
최근 작금의 사태와 관련하여 검찰의 잘못 때문에 정부가 피해를 보고 있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검란"의 원인과 배경은 거듭된 검찰인사의 잘못과 검찰권에 대한 간섭에서 비롯된 만큼 인사권자인 정부 최고책임자의 책임문제가 가장 크다고 보아야 합니다.
더구나 문제가 된 일부 검사의 책임문제는 차치하고 이와 무관한 전체 검사가 잘못한 것처럼 호도하면서 마치 정부는 무관한 것처럼 책임을 전가하는 발상과 주장에는 전혀 공감할 수 없으며, 국민으로 하여금 검찰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키는 것으로서 결코 검찰을 살리는 길이 못됩니다.
검찰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곧 국가와 정부를 살리는 일임에도 마치 별개의 일인 것처럼 검찰을 두드리면 되겠습니까?
친애하는 검찰가족 여러분!
정치적 중립성을 잃은 검찰은 이미 본연의 검찰이 아닐 뿐만 아니라, 두목의 눈치나 보며 서민의 가슴에 못을 박는 폭력조직과 다를 바 없다고 한 어느 현직 검사장의 말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검찰의 중립과 독립을 이루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가 바라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검찰의 중립과 독립은 그 본질을 외면한 채 특별수사검찰청 같은 일부 조직의 명칭이나 바꾸고 물을 타는 식의 제도변경이라든가 지방색의 부분적 안배와 같은 인적교체를 통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검찰의 중립과 독립은 검사들을 비롯한 검찰조직원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과거의 정치검사 같은 사람들이 품고 있던 마음속의 잔재를 없애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검사 임관시에 사회정의 , 파사현정 과 같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덕목을 구현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지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러한 초심으로 돌아가 정의를 향한 정열을 불사르며 불의에 대한 척결의지를 굳게 다지면서 어떠한 외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공정한 칼날을 휘두른다면 검찰은 바로 서게 될 것입니다.
칼에는 눈이 없습니다. 칼은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칼을 쥔 사람이 찔릴 수도 있습니다.
권력과 금력을 배경으로 힘없고 소외된 계층을 괴롭히는 거악을 향해 추상같은 칼날을 휘둘러 이들로 하여금 이 사회에서 발붙일 수 없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검찰 본연의 자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오히려 칼은 우리를 향해 돌아오게 될 것이므로 우리는 그 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정의의 칼 을 잘 써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와같이 정의를 바로 세우는 과정에는 반드시 희생이 뒤따를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 라는 사실을 역사가 증언하듯이 검찰의 독립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희생이 수반될 것입니다.
검찰의 독립을 위해 필수적인 이러한 고통은 이제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제가 이러한 십자가를 스스로 지지 못하고 여러분들에게 짐을 지운채 검찰을 떠나게 되어 매우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검찰의 장래에 대해 비관만을 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이 끝을 향해서 나아가고 또 끝에 도달하면 새로 시작하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하여 있는 위기상황 역시 이 체제가 그러한 것처럼 진정한 검찰로서 거듭 태어나기 위한 과도기적 역경일 뿐입니다.
신은 우리에게 극복하지 못할 시련을 주지는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한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봄을 맞은 꽃이 눈부시게 아름답듯이 현재의 시련과 고통을 딛고 다시 태어날 우리 검찰의 앞날은 찬란한 영광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저는 밖에 나가더라도 여러분들의 피나는 노력에 뜨거운 성원을 보내며, 여러분들이 받을 고통 역시 함께 나누겠습니다.
친애하는 검찰가족 여러분!
지난날 우리들의 잘못된 관행은 철저히 타파하고 이제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하여 우리 조직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선배들은 검찰권 수호의 바람막이가 되겠다는 각오로 몸을 바쳐 후배들의 디딤돌이 되고, 후배들 역시 선배들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며 나라사랑으로 똘똘뭉친 조직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후배들로부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이른바 요직에 등용되는 인사시스템이 반드시 정착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좋은 선배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채 하찮은 지위로 밀렸기 때문에 조직을 떠나야 한다거나 후배를 위해 길을 터준다는 억지춘향의 이름아래 검찰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작금의 사태도 없어져야 하겠습니다.
선배는 후배의 싹을 자르지 말아야 하고, 후배는 선배가 물러나기를 바라는 조직이 되면 안됩니다.
검찰은 선비가 있을 곳이 못된다 고 자조적인 말을 하고 퇴직한 어느 검사장과 같은 사람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자기 소신껏 일할 수 있는 평생검사제의 풍토를 지켜내야 검찰의 영속성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연부역강(年富力强)한 후배 인재들을 의기소침하지 않게 하고,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며, 정치권의 눈치만 살피며 줄대기를 좋아하는 요령좋은 인사들을 과감히 퇴출시키는데 앞장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검찰이 자세와 능력을 겸비한 정예조직원들로 구성되고 법률기술자 가 아닌 진정한 검찰인으로서 다시 태어나 상경하애하는 분위기 속에서 신명나게 일할 때 우리는 국민의 신뢰와 사랑속에서 검찰의 부활을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검찰가족 여러분!
정말 우리 검찰조직은 국가의 기간입니다. 검찰이 부패하거나 무능하면 나라의 존립이 흔들리고, 또한 국가가 흔들리면 자유민주주의도 설 땅을 잃고 맙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 자리를 빌어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암약하는 세력이 상존하고 있음을 경고하면서 이들을 척결하고 국가를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검찰 본연의 막중한 임무임을 잊지 말아달라고 여러분께 당부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며 정들었던 우리 검찰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 국가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슴 깊이 묻고, 검찰의 독립을 향해 끝없는 희생과 노력을 통해 거듭나도록 하십시다.
저는 이제 검찰을 마지막으로 떠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제 마음은 항상 검찰에 있을 것을 다시 한번 약속합니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지는 것처럼 저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좋은 추억으로 남아 기억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부산=석동빈기자 mobid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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