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암을 반드시 이겨야한다고 생각했지. 몸 안에 폭탄을 집어 넣어서라도 그 놈을 깨부수고 싶었어. 그런데 요즘은 많이 달라졌어. 암은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니라 토닥거려야해. 마음을 안정시켜야하는데 작은 일에도 자꾸 화가나 걱정이야.”
새해 첫날, 우리에게 덕담처럼 들려주시던 말씀이었는데 정말 암과 동행하여 먼길을 떠나셨단 말입니까?
우리는 당신을 보내 드릴수가 없습니다. 뭔가 보여주겠다고 하시더니 결국 이겁니까? 오히려 원망하고 싶습니다. 수많은 고생도 다 겪어냈는데 폐암쯤이야 못 이겨내겠느냐며 우는 후배를 나무라시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셨단 말입니까?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세상이 시끄럽고 언론자유도 극도로 위축되던 그 춥던 계절에 당신은 혜성처럼 나타나 전국을 폭소강풍으로 몰아쳤습니다. 칼라 텔레비전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인데 당신의 등장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엉덩이를 빼고 뒤뚱뒤뚱 걷던 걸음걸이와 수지 큐 노래는 당신을 코미디황제로 등극시켰습니다. 학교에서, 골목길에서, 안방에서, 술집에서, 모두들 수지 큐 보행법을 익히느라 정신들이 없었습니다. 비판도 많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어려운 시절을 견디는 힘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셨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했고, 못생겼고, 수 없는 좌절을 경험했기에 당신의 성공은 가난한 사람, 못생긴 사람, 희망을 잃은 사람, 모두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당신의 코미디에는 눈물이 배어있었기에 위대했고 스스로를 바보처럼 낮추었기 때문에 빛이 났습니다. 못생겨서 죄송하다는 당신의 페이소스는 외모만 따지는 사회에 대한 통렬한 항변이기도 했습니다.
91년 11월이었던가요? 외아들 창원군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그 해 겨울 내내 당신은 바닷물만큼 술을 마시고 강물만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낮에는 웃기고 밤에는 울던 당신의 슬픔은 우리까지도 힘들게 했습니다. 이제 아들을 만나셨으니 보고싶은 정회를 마음껏 푸십시오.
1992년 초 당신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주일(본명)의원이 되셨습니다. 서민의 아픔을 알기에 의정활동이 뛰어난 베스트의원에 뽑히기도 했지요.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보다 연예계로 돌아왔을 때가 더욱 기뻤습니다. 당신의 공백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중병에 걸린 것은 냉수와 150원짜리 자장면으로 배를 채우던 어려운 그 시절을 잊고 산 것에 대한 벌이라면서 병상에서 자신을 질책하셨다지요? 아닙니다. 당신만큼 가난한 동료들을 돕고 겸손하게 사신 소탈한 분이 우리 곁에 누가 있습니까? 당신에게 받은 사랑을 하나도 되돌려드리지 못한 채 홀로 먼길을 떠나게 한 우리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수개월 병마와 싸우면서도 당신은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축구광으로 월드컵 16강을 염원했던 당신은 산소통과 휠체어에 의지하여 인천, 대전구장들을 찾아다니며 붉은 악마보다 더 혼신의 힘으로 필승코리아를 외쳤고 그 덕분에 우리가 4강에 진출했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폐암이 흡연 때문이라며 많은 애연가들에게 금연캠페인을 펼쳐서 한때는 300만 명이 금연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모두 다 잊으십시오.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이 원했던 웃음세상을 만드는 일은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당신은 이 땅에 웃음의 씨앗을 뿌려두고 가셨습니다. 우리가 이 삭막한 세상에 그 꽃을 활짝 피우겠습니다.
어느 날 천상에서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리면 당신이 천사들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천국에서 편히 쉬십시오.
이남기 SBS 제작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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