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는 반드시 에이즈 검사를 해야 국산 치료제를 주었습니다. 나도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국산 제품을 쓰기 시작했지요.”
90년대 초 국산 혈우병 치료제를 주사 맞고 에이즈에 감염된 A씨(33)는 15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번에는 제대로 조사해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오염된 국산 혈우병 치료제를 맞고 18명이 에이즈에 집단 감염된 사건에 대해 재조사가 시작된 가운데 A씨는 “보건당국이나 국회가 진상 규명에 나서면 적극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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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 종사자인 A씨는 대학 2학년 때인 93년 말 에이즈 판정을 받고 학교를 그만둔 뒤 그늘 속에서 10년을 살아왔다. 그는 2년 전부터 에이즈 증상이 나타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조금만 무리를 해도 몸에 붉은 물집이 생기고 혓바늘이 돋는다. 체력 저하로 잠을 참을 수가 없어 길을 가다가도 차를 세워놓고 잠을 청한다.
“에이즈 양성반응 통보를 받은 첫날은 너무 황당해서 웃었습니다. 다른 사람 얘기처럼 아득하게 들렸죠. 부모가 울고, 다리가 불편한 나를 업어서 키웠던 형이 제약회사 사람과 싸우면서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그의 혈소판 수치는 정상인의 10%밖에 안 된다. 콩팥도 한쪽이 작아졌다.
하지만 그는 에이즈 치료제를 쓰라는 의사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홍삼과 한약 등을 먹으면서 에이즈와 싸우고 있다. 치료제가 당장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내성이 생겨 나중에는 속수무책이 되기 때문이다.
“집단 감염 당시 한 엄마는 2명의 어린 자식에게 국산 혈우병 치료제를 맞혔는데 모두 에이즈에 걸렸습니다. 전혀 수혈이나 외국 제품을 주사해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혈우병은 유전되는 데다 에이즈 환자라는 게 드러나면 시달려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 보상을 요구하지 못하고 있지요.”
그는 에이즈뿐 아니라 C형 간염에도 걸렸다. 역시 혈우병 환자인 외삼촌도 C형 간염 때문에 고생을 했다. 한국혈우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1600여명의 혈우병 환자 가운데 50%가 C형 간염 바이러스에도 감염된 상태다. A씨는 “하지만 국내 제약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던 환자는 오히려 무고죄로 옥살이까지 했다”고 한숨지었다.
“선진국에서는 수천명의 혈액을 농축해 만드는 치료제 대신 안전한 유전자 재조합 혈우병 치료제를 90년대부터 이미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보건당국은 국내 제약회사의 말만 듣고 힘없는 환자들의 수입 요구를 묵살해 왔습니다.”
이번 조사로 감염의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더라도 그의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끝나는 게 아니다.
“의사 선생님과 언론이 관심을 가져주니, 에이즈 치료제가 나오는 그날까지 버텨야지요.”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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