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플레이의 적들<1>]학벌에 차이고… 지역에 막히고…

  • 입력 2002년 3월 31일 18시 34분


21세기 한국사회에는 숱한 ‘장벽’들이 존재하고 있다. 정권교체에 따라 새로운 ‘성골’과 ‘진골’이 생겨나고 갖가지 연(緣)이 성패를 결정한다. 사회 각 부문에 ‘진입장벽’(Entry Barrier)이 두껍게 처져 페어플레이를 봉쇄하고 있다.

그 결과 정당한 실력과 기술, 효율, 신용은 설 자리가 좁아지고 대신 연줄과 독점, 비효율, 부패가 만연해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대학의 ‘동종교배’와 진입장벽〓서울대 법대는 3월 초 신임교수 임용 심사를 했다. 비(非) 서울대 출신을 뽑도록 한 학교 규정에 따라 다른 대학 출신의 박사 2명이 응시했다.

일부 교수들은 “처음으로 타대학 출신을 뽑는 것인 만큼 좀 부족해도 뽑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수는 “기준에 못미친다”며 부정적이었다. 결과는 6대 3으로 부결.

서울대가 99년 9월 신규 임용한 교수 75명 중 73명이 서울대 출신이었다. 교육부는 학문간 ‘동종교배’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공무원 임용령을 고쳐 99년 9월 이후 3년간 국립대 신규 채용 교수의 30% 이상을 타대학 출신으로 임용토록 했다. 그러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대학 시간강사 이모씨(32·여)는 “시간강사 자리를 구하면 그 때부터 지도교수, 학과장, 이사장 등에 대한 ‘줄타기’에 들어가야 한다”며 “운좋게 전임강사가 돼도 명문대 출신이나 그 대학 출신이 아니면 텃새 때문에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교수들 사이의 파벌도 심해 명문대나 동문 출신이 아니면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고 왕따당하는 경우가 많다.

▽평생 족쇄가 되는 학벌〓학벌은 넘기 어려운 길고도 높은 장벽이다. A기업 인사부 차장 최모씨(39)는 “간부급 이상 임원 대부분이 명문대 출신인데다 주요 보직도 다 꿰차고 있어 ‘자기 후배 끌어주기’ 풍토가 극심하다”고 말했다.

그는 “비 명문대 출신은 일정 단계에 오르면 더 이상 승진이 안 돼 회사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며 “비 명문대 출신들 사이에서는 ‘입사해서 10년 안에 승부를 내고 작은 가게라도 차리자’는 게 정해진 코스처럼 돼 가고 있다”고 전했다.

▽정치도 독점〓6월 지방선거에서 경북 지역 시장 선거에 출마할 예정인 B씨는 택시를 타면 자신의 이름을 말하면서 거스름돈을 받지 않는다. 그는 “현역 시장 등은 직무를 빙자해 각종 선심성 행사와 시정홍보회 등을 열어 사실상의 사전 선거운동을 하는데 정치 신인인 나를 알릴 수 있는 길은 이것 뿐”이라고 말했다.

현행 선거법상 정치 신인은 공식 선거운동 기간에만 선거운동을 할 수 있고 그 기간에도 개인 홍보물을 개별적으로 배포할 수 없다. 그러나 현역 의원들은 선거운동 기간 전에도 당원단합대회나 의정보고회, 당원교육 등을 마음대로 하면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이처럼 정치권은 정치 신인이 넘기 어려운 높은 진입장벽을 쳐놓고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정당조직에도 변화의 조짐은 있지만 여전히 수직적 독점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법조계도 연줄 우선〓룰(Rule)의 사회인 법조계에도 룰보다는 연줄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지방의 고등법원 부장판사인 C씨는 “지방에 온지 한 달 쯤 됐는데 내가 맡는 사건에 이 곳 변호사가 아니라 멀리 서울에 있는 고교 동문이나 연수원 동기가 변호사로 선임돼 온다”고 털어놓았다.

실제로 변호사 업계에서는 형사사건 변호사 선임 1순위는 판사의 고교 동문이고 그 다음이 연수원 동기, 다음이 대학 동기라는게 공식처럼 돼 있다.

한 중견 변호사는 “최근 대형 로펌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검찰과 법원의 고위직 출신 영입 경쟁도 연줄 및 전관 프리미엄과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법조계의 페어플레이를 저해하는 최대 요소는 브로커다. 이들은 의뢰인들에게 담당 검사나 판사와 연줄이 있는 변호사를 소개해 주고 수임료의 30% 정도를 소개비로 받는다.

▽고층 아파트보다 높은 선발업체 장벽〓D산업은 2000년 3월 건축업계에서 알아주는 유능한 건축 기술사 5명과 건축사 12명을 스카우트해 의욕적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단 한건의 관급 공사도 따내지 못했다. 입찰시 최근 3∼5년간 누계 시공실적을 제출하라는 통에 기준에 미달돼 떨어졌다.

이 업체 관계자는 “기득권 세력인 선두업체에 유리하게 짜여진 기준 때문에 신규 업체는 기술 수준이 아무리 뛰어나도 시장에 진입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문화 예술계의 장벽〓지난해 신인 가수 K씨의 아버지는 음반 제작비에 접대비를 포함해 10억원 가량을 쏟아부었으나 아들이 TV 프로그램에 잘 등장하지 않자 해당 방송사에 투서를 보냈다.

한 연예계 인사는 “신인 가수의 음반 판매와 성공 여부는 방송 출연 빈도와 직결되는데 실력과는 상관 없이 프로그램 제작진과의 친소 관계에 따라 출연 여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전국 개봉관의 90% 이상이 영화 ‘해리포터’ ‘두사부일체’ ‘화산고’ 등 메이저 배급사의 영화로 채워지고 다른 영화들은 얼굴도 내밀지 못했다.

모영화제작사 관계자는 “영화시장의 독점구조와 진입장벽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며 “대형 배급사를 만나지 못하면 상영 기회를 갖기 어렵고 결국 관객을 만날 기회조차 없다”고 말했다.

배우시장도 마찬가지. 기존의 매니지먼트사를 통해 배급사 및 제작사와 연결돼 있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감독이나 시나리오가 있어도 빛을 보기 어렵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

이명건기자gun43@donga.com

자비에르 스메켄스
▼주한유럽연합商議 회장이 본 한국▼

한국에 온지 5년째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크게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느낀 적은 없다. 한국인은 외국인에게 친절하고 항상 호감을 갖고 대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서 기업활동을 하는 유럽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들은 자유로운 기업활동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기업간 국제적 자유경쟁을 제약하는 유무형의 진입장벽들 때문이다.

주한유럽연합상공회의소가 이들의 경험을 토대로 최근 발간한 ‘2002 무역장벽보고서’가 이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유럽의 기업인들은 특히 정부의 과도한 개입과 규제 등에서 개선할 부분이 많다고 지적한다.

자동차의 경우를 보자. 한국인은 외제차를 사면 주변 사람들에게서 비애국적인 소비활동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고 세무조사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장벽이다. 한국의 디젤자동차 배출가스 기준은 유럽에 비해 매우 엄격한 수준이어서 가장 발전된 기술로도 만족시킬 수 없다.

세금에 세금을 덧붙이는 방법으로 외국자동차 생산업체에 지우는 부담도 상당하다. 인증에 필요한 서류만도 100여쪽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지나치게 많다.

법조계는 어떤가. 외국로펌은 한국에서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없고 외국 변호사가 개업할 수도 없다. 한국 로펌에 고용된 외국 변호사는 200여명이나 되지만 행정 관리를 받지 못하고 등록 체제도 없다. 적절한 법률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한 외국기업들이 한국에 대한 투자를 포기하는 경우도 생긴다.

시장에서 가짜 유명브랜드가 공공연하게 전시 판매되는 현상도 공정한 기업 경쟁을 가로막는다. 지적재산권의 보호 방안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의 특혜성 기업지원과 금융기관의 ‘국유화’ 등도 여전하다.

한국은 아직 기회의 땅이고 투자할 영역도 넓다. 유럽인의 투자는 점점 늘고 상호교류도 확대되는 추세다. 한국 기업은 책임의식이 강하고 외국인과의 사업 협력에 관심이 많다.

이런 곳에서 공정한 기업경쟁을 가로막는 진입장벽 문제들이 앞으로 대화와 토론을 통해 개선돼 나가기를 기대한다.

정리〓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전문가들 “이렇게 풀자”▼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 각 분야의 ‘페어플레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기형적인 경쟁구조라고 지적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 실력으로 경쟁해 승부가 결정되는 구조가 아니라 일단 ‘진입’에 성공하면 그 다음에는 ‘무풍지대’가 된다는 것.

‘학벌 없는 사회 만들기’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김동훈(金東勳) 국민대 법대 교수는 “우리 사회는 모든 분야가 진입하는 문턱에서 심한 경쟁을 해야 하는 구조”라며 “명문대에 목메고 있는 대학입시 풍토나 고시 열풍이 단적인 예”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기형적인 경쟁을 통해 진입 문턱만 넘으면 그 다음에는 별다른 경쟁이 없다”며 “명문대 졸업생끼리, 고시 합격자끼리 서로 뭉쳐 ‘밀어주고 끌어주며’ 세력을 만들어 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도 개혁과 함께 ‘간판’이 아닌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의식 개혁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는 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우선 사법시험을 정원제가 아닌 자격시험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형식적으로 운영되는 계약 교수제도 적극 활용해 보다 많은 사람에게 교수로 임용될 수 있는 공평한 기회를 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호기(金晧起)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의 최대 진입장벽은 학벌중심주의”라며 “이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파벌과 진입장벽이 조성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학벌중심주의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소위 몇몇 명문대에 집중돼 있는 물적 인적 지원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키는 대학개혁이 선행돼야 한다”며 “대학들을 전공에 따라 특화하고 지방대학을 정책적으로 육성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고시를 포함한 각종 공무원 시험에 지역별로 해당 지역 출신이나 해당 지역 대학 졸업생에게 우선적인 기회를 주는 방식을 도입하는 것도 학벌중심주의 완화의 한 방법”이라고 제시했다. 그는 “이런 노력이 없다면 우리 사회의 진입장벽 낮추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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