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의 공교육과 사교육]<2>일본의 실험

  • 입력 2002년 9월 9일 17시 54분


도쿄대 교육학부 부속 중등학교 1학년생들이 한 학기 동안 탐구한 내용을 조별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 도쿄=박용기자
도쿄대 교육학부 부속 중등학교 1학년생들이 한 학기 동안 탐구한 내용을 조별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 도쿄=박용기자
《도쿄대 교육학부 부속 중등학교 1학년 종합학습시간. 1학년 학생 120명과 기모노를 차려 입은 학부모 50여명이 강당에 자리를 잡았다. 이날은 학생들이 1학기 동안 지역 하천인 ‘칸다가와(神田川)’를 따라서 26㎞를 답사하며 환경, 역사, 생태, 수해대책 등을 팀별로 연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

학생들은 자기 팀의 차례가 되면 강단 옆에 나가 발표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칸다가와는 1955년 도시의 하수가 유입되면서 오염됐어요. 하천을 관리하는 각 구청을 찾아가 오염 대책도 조사했습니다.”

하천 오염실태를 발표한 팀은 답사를 통해 오염 실태를 꼼꼼히 조사하고 사진, 주민 인터뷰 등을 곁들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글 싣는 순서▼

- <1>미국

일본은 ‘여유있는 교육’을 표방하며 입시와 사교육에 찌든 일본 교육을 획기적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한창 진행하고 있다. 올해부터 주5일 수업을 시작한 일본은 초중고 수업을 30% 줄이는 실험을 하고 있다. 또 ‘신학습지도요령’에 따라 전국 초중고에서 현장 체험학습을 강조하는 종합학습일을 운영하도록 했다.

▽일본 공교육의 변신〓도쿄대 부속 중등학교는 2000년 시범학교로 지정돼 1주일에 2시간씩 종합학습일을 운영하고 있다. 1, 2학년은 연구 기초를 닦고 3, 4학년에 진학하면 ‘과제별 학습’을 하며 5, 6학년은 스스로 주제를 정해 논문을 내는 ‘졸업연구’ 등으로 수업 내용이 바뀐다. 학생들은 이런 교육과정에 따라 스스로 연구하는 능력을 키우고 졸업 논문을 작성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된다.

올해 6학년은 ‘만화의 가능성’ ‘21세기의 자동차’ ‘소년범죄와 감수성’ 등 104편의 졸업 논문을 냈다.

종합학습의 평가는 교사, 학생, 학부모 모두 참여하는 것이 특징. 발표내용, 자료활용과 발표방식, 팀별 협력 등 3가지 항목을 각각 5점 만점으로 채점해 성적에 반영한다.

미츠하시 토시오 부교장은 “다양한 체험과 학생 스스로 연구하는 능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학교 수업이 변하고 있다”며 “학교에서 못다한 학업이나 입시 준비는 학원에서 개인적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말했다.

▽여전한 사교육 열기〓교육개혁이 진행되고 있지만 ‘주쿠(塾)’로 대표되는 일본의 사교육 열기는 뜨겁다. 대학 입시는 물론 명문 사립 중고의 입시경쟁이 있기 때문. 일본 학원은 학교 내신을 관리해주는 ‘초슈주쿠(補習塾)’와 상급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신가쿠주쿠(進學塾)’로 나뉜다. ‘로우닌(浪人)’으로 불리는 대입 재수생은 ‘요비코(豫備校)’에 다닌다.

신가쿠주쿠는 특정 학교 진학반을 개설하고 있다. 종합반의 경우 한달 2만∼40만엔까지 수강료는 천차만별. 초슈주쿠는 방과후 과외 형태로 운영되며 그 지역 학교의 기출 시험문제 등을 풀어주고 내신성적을 관리해준다. 주1회 100분 기준으로 과목당 2500엔 정도이기 때문에 5과목을 수강해도 월 1만2500엔이면 충분하다. 학원 개인과외도 시간당 3200엔 정도여서 가계에 큰 부담은 되지 않는다.

도쿄 외곽의 중산층 베드타운인 ‘히카리가 오카’에 위치한 초슈주쿠 ‘소우메이칸(創明館)’. 설립된 지 15년이나 돼 꽤 알려진 보습학원이다. 시험을 치러 학생을 선발하고 근처 학교 학생의 내신을 전문적으로 관리해준다.

중학교 내신반은 영어 수학을 포함해 전 교과를 배운다. 인근 명문 사립고의 입시에 중학교 내신이 40% 반영되기 때문. 중학교 시험기간이면 학원에서는 기출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학원이 시험문제은행 체인점으로 가입해 인근 학교의 기출 시험문제를 컴퓨터 단말기로 제공하기도 한다.

오사토 에이스케(61·이바라키현 미토시)는 “내 자녀가 직장상사 자녀보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면 아무래도 눈치가 보인다”며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일본 학부모의 학력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학원 원장인 요시다 토시호코(43)는 “일본 학교는 한 학급이 40명 정도여서 학생들이 개인별 수준에 맞는 수업을 받지 못한다”며 “그래서 중3의 70∼80%가 학원에 다닐 정도로 사교육이 퍼져 있다”고 말했다.

▽사교육은 공교육의 보완재〓일본의 사교육은 한국과 비슷하다. 보습학원에서 학교시험을 찍는 요령을 가르쳐준다. 사설 학원의 전국모의고사 배치표에 따라 지원할 대학을 고른다. 학원들은 명문대 합격생 명단을 전단으로 만들어 학원 광고에 활용한다. 그래서 일본도 학교에서 사설 학원의 시험을 치르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다.

일본에도 학교 진도를 앞서 배우는 ‘사키도리’(先取)라는 선행학습이 유행이다. 명문 사립중 입시를 치르기 위해 초등학생이 중학교에서 배우는 인수분해를 공부하는 일도 흔하다. 2월 사립중 입시를 앞두고 초등 6학년들이 오후 9∼10시까지 학원에서 공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의 사교육은 공교육의 보완재로 인정을 받고 있는 점이 한국과 다르다. 명문대에 가야 성공한다는 인식이 사라지면서 일본의 입시는 소수의 공부벌레 학생들이 벌이는 ‘그들만의 리그’로 바뀌었다. 치열한 경쟁으로 사교육비가 저렴해진 것도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11년 경력의 초등학교 교사 이시모토 히로코(34·여)는 “학교에서는 학원 공부와 달리 개념 중심의 수업을 강조한다”며 “명문 사립중고나 대입 준비를 하려면 학원에서 공부하라고 학생들에게 말한다”고 소개했다.

도쿄〓박용기자 parky@donga.com

▼일본 중고생들의 하루▼

도쿄대 교육학부 부속 중등학교 학생들이 자신들의 과외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 도쿄=박용기자

일본 중고생들의 하루는 어떨까. 도쿄대 교육학부 부속 중등학교 학생들과 하루 일과와 과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 중고생 가운데는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고 학원에서 학교 진도보다 1년 정도 앞서 선행학습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일본 학생들은 많은 수가 학원에 다니고 있지만 모두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며 학원 때문에 학교 공부를 제쳐놓은 일은 보기 드물다고 한다.

“학원에서 미리 배워두면 학교 공부에 도움이 돼요. 만약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면 실력이 크게 떨어질 거예요.” 3학년 오오츠카 유마(15)는 유치원 때부터 학원에 다녀 과외를 하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로 과외에 의존하는 편이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는 고교 수학 개인과외를 받았다.

오오츠카는 “초등학교 때 배웠던 고교 수학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용어 등이 익숙해 학교 수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5학년(한국의 고2) 이와사키 요코(16·여)는 사립 중학교에 진학하려고 보습학원을 다니며 전문학원 입학시험까지 준비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진학학원에 합격한 뒤 1년 동안 중1 수준의 입시 공부를 했지만 사립 중학교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다.

역시 5학년인 가와나마 리에(16·여)는 “중학교 입학 전 1학년 과정을 끝내 학교 수업을 복습하는 기분으로 들었다”며 “대학 입시를 위해 평일 방과후에 2시간씩 주2회, 수업이 없는 토요일은 오전 9시부터 4시간 동안 신주쿠(新宿) 지역 학원에서 영어와 수학을 배운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모든 학생이 과외를 받는 것은 아니다. 입시 공부보다 학생회 등 다양한 특별활동에 참가하는 학생들도 늘고 있다.

학생회장인 요시다 아야코(17·여)는 고교를 마치고 전문학교에서 디자인을 배울 생각이지만 학생회 일이 너무 바빠 학원에 다닐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하야시 사토미(17·여·5학년)도 “중2까지 학원을 다녔지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코야마 미사코(15·여·4학년)는 오전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학교 운동장에서 1시간 동안 달리기를 한다. 체력관리를 위해서다. 오후 3시 수업이 끝나면 곧장 교내 동아리 축제인 ‘문화제’ 준비활동을 한다. 문화제 예산을 편성하고 발표회 준비 등을 하다 보면 오후 7시를 넘어 집에 들어가기 일쑤다.

전교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미사코는 “학원에서 미리 배우면 학교 수업이 재미없다”며 “수업이 없는 토요일 오후에는 2시간반 동안 영어회화를 배운다”고 말했다.

도쿄〓박용기자 parky@donga.com

▼도쿄대 교육학부 시오미 교수▼

“일본의 공교육은 한때 ‘신간센(新幹線) 교육’으로 불렸습니다. 우수 학생만 끌고 가고 뒤처지는 아이들은 방치해 사교육을 부추긴 측면이 있습니다.”

도쿄대 교육학부 시오미 토시유키(54·사진) 교수는 일본 공교육이 사교육 문제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비판했다.

경제 급성장과 함께 고교 진학률이 1960년대 60%대에서 75년에는 95%까지 치솟았다. 이 때 학교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사교육 시장이 서서히 형성됐다는 것.

“60년대는 평준화된 명문 공립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위장전입’이 가장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70년대 와서 대학 진학반을 개설한 사립 중고교 입시가 사회 문제가 됐어요.”

그는 “70년대에는 초등학생이 종전에는 중학교에서 공부하던 것을 배울 만큼 교육과정이 어려워져 학습 부진아가 학년별로 10%나 됐다”고 덧붙였다.

80년대 들어 사립중고들은 6년 과정을 5년만에 마치고 1년간은 대학 진학반으로 운영해 입시 명문고로 부상했다. 이 때문에 사립고의 입시를 도와주는 진학학원이 생겨나 학원산업이 형성됐다. 최근에는 체인점식 기업형 학원도 등장했다.

시오미 교수는 “명문 진학학원은 반배정, 자리배정 시험까지 보기 때문에 일부 초등학생은 2학년부터 집 근처 보습학원에서 명문 진학학원에 들어가는 준비를 하고 4학년 때는 진학학원에서 다시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사교육 문제가 커지자 공교육을 개혁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생겼습니다. 창의력과 인간관계를 배워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것이 학교 교육의 가장 큰 목표가 됐습니다.”

일본은 89년부터 공부 부담을 줄여주는 ‘여유있는 교육’을 추진했다. 학생 수가 줄어 대입 경쟁률이 1 대 1을 밑돌면서 사교육 열기도 차츰 가라앉았다.

“‘명문대 입학〓성공’이란 등식은 깨졌습니다. 과거에는 상위 10% 학생만 들어가는 중학교 입시를 위해 40%의 학생이 매달렸지만 이제는 들어갈 사람만 공부합니다.”

시오미 교수는 “요즘 학력이 저하됐다는 비판이 일면서 정부도 적은 비용으로 학업을 보충하는 사교육을 인정하는 분위기”라며 “학원의 영어강사가 특강을 하는 초등학교도 있다”고 말했다.

도쿄〓박용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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