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번 돈이지만 생계유지를 위한 돈 외에는 내 것이 아니다. 이 돈은 모두 사회에 기부하는 것이 낫다.”
함남 원산 출신의 기업가 홍산 김홍기(鴻山 金鴻其·1921∼1992) 씨가 남긴 유언의 일부다.
김 씨는 1961년 유신화학㈜을 시작으로 화인인더스트리㈜, 정익기업㈜ 등 주로 화학업종의 회사를 여럿 창업한 자수성가형 기업가였다. 그는 1992년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유언에서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할 뜻을 밝혔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뒤 김 씨의 부인 엄순녀(81) 씨가 남편의 뜻에 따라 지난달 경기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도립공원 내 6770m²(6필지)의 땅을 경기도에 기부한 사실이 4일 알려졌다. 시가로 12억 원이 넘는 규모다.
엄 씨는 “남편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번 돈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면서 “미약하지만 남한산성 발전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기부 이유를 밝혔다.
엄 씨의 기부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1992년 서울 서초구에 홍산박물관을 세웠다. 김 씨가 수집한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토기들을 전시한 당시 문화부 등록 1호 사립박물관이었다.
1999년 박물관이 자금사정으로 문을 닫자 엄 씨는 소장 문화재 1512점을 200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당시 엄 씨는 “더 많은 사람에게 수집품을 볼 기회를 주기 위해 기증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엄 씨는 100억 원대의 홍산장학재단도 설립해 기초과학분야의 우수 학생들에게 매년 5억∼7억 원씩 장학금을 주고 있다.
이처럼 기부활동을 활발히 하면서도 엄 씨는 기부현장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번 남한산성 땅 기부 때도 지난달 기부계약을 하기 위해 장학재단 사무실을 찾은 게 유일하다.
이날 엄 씨는 “내가 직접 나온 이유는 (남편의 뜻이) 거짓이 아니며 세상이 믿음을 가져 달라는 생각 때문”이라며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손자손녀들이 나중에 커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렇게 훌륭한 일을 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것.
경기도는 지난해 12월 30일 남한산성 관리사무실에서 조촐한 감사패 전달식을 열었지만 엄 씨는 끝내 참석하지 않고 홍산장학재단 관계자를 대신 보냈다.
김창배 도 공원관리과장은 “옷차림도 수수하고 버스를 타고 다닐 정도로 소탈하신 분이어서 깜짝 놀랐다”며 “남한산성에 기부자의 뜻을 남길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수원=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