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지 않았냐고요? 기증 날짜를 받아놓고 기다리려니 살짝 겁이 나기도 했죠. 하지만 건강한 내가 잠시 동안만 불편한 걸 참으면 소아암으로 고통 받는 한 소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었더니 저도 모르게 용기가 나더라고요.”
지난달 28일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자신의 골수(조혈모세포)를 기증하는 수술을 받고 30일 퇴원한 김은옥 씨(29·사진). 골수를 채취한 골반뼈 부위의 뻐근한 통증 때문에 거동이 불편한 와중에도 누군가에게 새 생명을 줬다는 뿌듯함에 인터뷰 내내 흐뭇한 표정이었다.
김 씨는 2004년부터 대한적십자사 인천혈액원에서 일하고 있는 간호사다. 헌혈자들을 상대로 헌혈과 골수기증을 권유하고 기증의 안전에 대해 교육해 오던 그는 2005년 골수기증을 결심하고 신청했다. 그러던 중 올해 2월 자신의 골수 유전자(조직적합성항원형)와 일치하는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골수 안에 비정상적인 세포가 과도하게 증식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만성골수성백혈병은 유전자가 일치하는 기증자의 골수를 이식받는 것이 유일한 치료법. 백혈병 치료에 골수기증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잘 알고 있던 김 씨는 주저 없이 기증에 동의했지만 김 씨의 남편과 부모가 만류에 나섰다. 골수기증이 혹시라도 김 씨의 건강에 나쁜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지난해 결혼한 김 씨가 올해 아이를 가질 계획이었다는 사실도 남편과 부모를 불안하게 했다.
“골수기증자와 환자의 유전자가 일치할 확률은 2만분의 1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토록 어렵게 찾은 희망인데 이제 와서 기증을 취소하면 학수고대하던 환자와 가족이 얼마나 실망하겠냐며 남편과 부모님을 설득했죠.”
김 씨는 남편과 부모를 설득하려고 올해로 예정했던 임신 계획을 내년으로 미루기까지 했다. 대한적십자사의 2008년 골수기증 현황에 따르면 골수기증 의사를 밝혀 놓고도 유전자가 일치하는 환자가 있다는 연락을 받은 뒤 가족의 반대나 본인의 거부로 실제 골수기증까지 이어지는 비율은 54.7%에 불과하다고 한다.
전신마취를 한 김 씨의 골반뼈에서 주사기로 채취한 약 1500mL의 골수는 채취 당일 만성골수성백혈병을 앓고 있는 여자 초등학생 환자에게 이식됐다. 하지만 기증자와 환자의 신원을 서로에게 비밀로 하는 규칙 때문에 김 씨는 자신의 골수를 이식받은 어린이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얼굴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중요하지 않죠. 다만 제 골수를 이식받은 환자의 수술 경과가 좋아서 어서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건강하게 지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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