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요구하자 심부름센터에 의뢰… 살해 뒤 암매장
아내전화로 허위문자 보내기도… 남편-업자 구속
동아일보 취재팀은 22일 전국 심부름센터 5곳에 “혼내줄 사람이 있는데 해줄 수 있느냐”고 문의했다. 3곳에서 “살인도 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 3곳은 하나같이 전화를 바로 받지 않고 발신자 표시로 남겨진 기자의 휴대전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N 흥신소’는 범행 대상의 나이와 직업을 상세히 물은 뒤 “(범행 대상을) 반신불수로 만드는 데 5000만 원, 살해하는 데 1억 원 정도 든다”며 구체적인 액수를 제시했다. 이 업체 관계자는 “중국 칭다오(靑島) 지역에서 넘어온 히트맨(청부살인업자)들이 일처리를 마치면 바로 출국하기 때문에 뒤를 밟힐 염려도 없다”고 덧붙였다. Y 심부름센터는 “살인을 포함한 ‘임무’ 완수 여부는 동영상과 사진으로 증명하니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말했다.
거절한 곳은 2곳이었다. 이들은 “폭행이나 살인을 해달라는 의뢰가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고 전했다. ‘K 리서치’ 심부름센터 A 대표(44)는 “‘없애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돈은 얼마든 줄 테니 다리 한쪽이라도 부러뜨려 달라’는 의뢰 전화가 매달 한 통 이상 온다”고 말했다.
이처럼 살인도 서슴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심부름센터를 이용해 실제로 아내를 살해하고 회사를 가로채려던 남편이 경찰에 적발됐다. 서울 성동경찰서는 사업가 아내를 살해해 달라며 1억9000만 원을 건넨 정모 씨(40)와 정 씨의 부탁을 받고 직접 살인을 실행한 심부름센터 운영자 원모 씨(30)를 각각 살인교사와 살인 혐의로 구속했다.
남편 정 씨가 아내를 청부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건 올해 5월. 성동구에서 월수익 2억 원대의 자동차 렌트 매매 업체를 운영하는 아내 박모 씨(34)가 이혼을 요구하자 정 씨는 아내를 살해하고 업체를 독차지할 계획을 짰다. 정 씨도 강남구 논현동에서 유흥주점 3곳을 운영했지만 실적이 나빴다. 정 씨는 자신의 주점 종업원에게 ‘뒷조사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심부름센터가 있냐’고 물어 원 씨를 소개받았다.
정 씨는 지난달 14일 아내 박 씨에게 “당신을 능력 있는 사업 파트너에게 데려다 줄 친구”라고 원 씨를 소개했다. 이어 원 씨는 박 씨를 성수동의 한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으로 데려가 폐쇄회로(CC)TV가 잡히지 않는 곳에 차를 세우고 목 졸라 살해했다.
이들은 범행을 숨기기 위해 박 씨가 가출한 것처럼 각본을 짰다. 원 씨가 시신을 경기 양주시 한 야산으로 옮겨 묻은 다음 날인 지난달 15일 정 씨는 “아내가 가출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원 씨는 박 씨가 살아 돌아다니는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여성의류 매장이나 네일숍 등 여성이 다닐 만한 가게에 다니며 물건을 사고 박 씨의 신용카드로 결제했다. 노출을 피하기 위해 CCTV가 없는 가게만 골랐다.
경찰이 박 씨 휴대전화로 전화하면 “개인적인 문제로 잠시 나와 있을 뿐이다. 곧 돌아갈 테니 걱정 마라”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경찰이 휴대전화 위치와 카드 사용기록을 추적해도 박 씨는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박 씨가 자녀와 사업체를 남겨두고 이유 없이 사라진 점을 수상히 여긴 경찰이 집중 수사한 결과 박 씨의 카드가 사용된 가게 주변 CCTV에 항상 등장하는 원 씨가 심부름센터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점을 확인한 경찰이 추궁하자 정 씨와 원 씨는 범행을 자백했다.
심부름업체의 불법 영업이 선을 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5년 2월 보험금을 노린 30대 여성이 심부름센터에 의뢰해 남편을 살해하는 등 문제가 심각해지자 경찰은 집중 단속을 벌여 보름 만에 심부름센터의 불법영업 302건을 잡아냈다. 이후 ‘막가파’식 심부름업체는 자취를 감춘 듯했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들의 활동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경찰은 “계약금만 챙긴 뒤 잠적하거나 ‘청부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하는 사기 업체도 상당수”라며 주의를 당부했다.
현재 폭행 및 살인은 물론이고 “배우자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빼내 주겠다” 등 타인 개인정보 입수를 약속하는 심부름센터의 영업행위는 모두 불법이다. 합법적으로 정보조사 영업을 하려면 사건 당사자나 담당 변호사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아야 한다. 가압류 및 가처분 현황과 같은 신용정보를 조사하려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신용정보업 허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심부름센터를 차릴 땐 사업자등록증 외엔 필요 서류도, 자격 요건도 없다. 원 씨는 지난해 5월 업소를 차리기 전에도 강도와 강도강간미수 등 전과 14범이었다. 올해 6월엔 의뢰를 받고 남의 개인정보를 빼내다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입건됐지만 원 씨는 이달 7일까지 인터넷 구인 사이트에 직원 채용 공고를 내며 버젓이 심부름센터를 운영했다. 원 씨처럼 사생활 침해에 청부 살인까지 맡아서 하는 불법 업체가 언제 어디서든 문을 열 수 있는 환경인 것이다.
합법 심부름센터의 모임인 한국민간조사협회 박경도 서울본부장은 “심부름센터를 개설할 때 운영자의 전과 유무와 업무 범위 등을 명확히 구분하고 처벌 조항까지 갖춘 법을 만들어 불법영업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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