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봉구 창동과 노원구 월계동에 걸쳐 있는 초안산(楚安山)에는 조선시대 궁중의 제반 업무를 담당했던 내시들의 묘 1000여기가 집단적으로 몰려 있는 내시묘역이 있다.
한국미술사연구소가 2000년 5월 이 지역을 정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곳에는 묘 1154기, 상석 511개, 향로석 210개, 망주석 58개 등의 각종 유물이 산재해 있다.
이들 묘 가운데 내시묘가 몇 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양반과 일반 서민의 묘 일부를 제외한 1000여기의 묘가 내시묘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내시들이 많이 묻힌 곳이라는 의미로 ‘내시네산’이라고 불러왔다. 주민들에 따르면 일제강점기까지도 매년 가을 마을에서 내시들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내시묘의 특징 중 하나는 묘의 방향이 궁궐 쪽인 서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다. 살아 있을 때 왕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했던 내시들이 죽어서도 궁궐을 바라보며 왕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함이라는 것.
내시묘 가운데 가장 연대가 앞선 것은 1634년에 묻힌 내시 승극철(承克哲) 부부의 묘다. 승씨 부부의 묘는 초안산에서 유일하게 묘비를 갖춘 내시묘로 승씨는 통훈대부(通訓大夫)라는 정3품의 품계까지 받은 인물이다.
초안산에 내시묘가 집단적으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우선 이곳이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후보지로 거론될 만큼 ‘명당(明堂)’이었다는 점이다.
초안산은 주변에 도봉산과 수락산, 용마산, 불암산 등 경치가 빼어난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데다 동서로 중랑천과 우이천이 흐르고 있어 전형적인 명당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또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내시들의 묘는 도성에서 10리 밖에 두게 하라’고 규정돼 있었는데, 법 규정을 지키면서도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을 바라보기에는 초안산이 적합했다는 것이다.
한국미술사연구소 김경섭(金京燮) 연구원은 “옛 문헌에 따르면 유력한 내시 집안과 나이가 들어 궁궐에서 나온 내시들이 초안산(당시 양주목) 일대에 많이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15세기 이후 내시묘를 비롯해 양반과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묘가 시기별로 분포하고 있어 조선시대 묘제 변천과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내시묘역(초안산 조선시대분묘군)은 올 3월 문화재청으로부터 사적 제440호로 지정됐다.
현재 이곳의 내시묘 중 상당수는 봉분이 사라지고 봉분에서 나무가 자라는 등 훼손이 심각한 상태여서 발굴작업을 포함한 체계적인 관리방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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