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을 가장 공포에 떨게 했던 야만족은 훈족이었다. 훈족 왕 아틸라는 피바람을 몰고 다니며 파괴와 살인, 방화와 약탈을 일삼았다. 오죽하면 교황 레오 1세가 아틸라의 로마제국 침공을 ‘신이 내린 천벌’이라 했을까.
게르만족 일파인 반달족의 ‘절름발이 왕’ 게이세리쿠스도 아틸라 못지않은 야만족 수괴의 대명사였다. 무자비한 문화 파괴 행위를 뜻하는 ‘반달리즘(Vandalism)’이란 말이 그의 로마 약탈에서 비롯됐다.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게이세리쿠스를 이렇게 묘사했다.
“마음속에 품은 의도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눌변이었지만 분노와 복수라는 엄숙한 정열에는 자진해 자기 한 몸을 맡겼다. 승리에 도움이 될 동맹자라면 교묘하게 부추겨 이용했고 적진 안에 증오와 싸움의 씨앗을 마구 뿌려 대는 음험한 기교도 터득하고 있었다.”
어려서 낙마 사고를 겪은 게이세리쿠스는 반달족을 뛰어난 뱃사람으로 길러 냈다. 반달족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아프리카의 로마’로 불린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해적(海賊) 함대를 이끌며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급기야 반달족은 455년 범선과 화공선(적선에 불을 지르기 위해 폭발물을 가득 싣고 띄워 보내는 배)을 이끌고 테베레 강을 거슬러 올라가 로마를 공략했다. 410년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쿠스에 이은 두 번째 로마 점령이었다.
6월 2일 반달족을 영접한 레오 1세는 도시를 파괴하는 행위만은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고, 게이세리쿠스는 로마에 머무는 2주 동안 이를 존중했다. 반달족은 후세의 악명과는 달리 그렇게 심한 파괴 행위는 하지 않았다는 게 역사가들의 평가다.
다만 반달족은 많은 금은보화와 함께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그 딸들, 많은 고관을 인질로 데려갔다. 황후 에우독시아가 스스로 자신을 포악한 황제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요청했다는 설도 있었지만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이후 반달족은 한동안 지중해의 패권자로 남았다. 그러나 게이세리쿠스가 477년 사망한 뒤 반달 왕국은 급격히 쇠락했고 한낱 야만족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