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7년 이한열, 최루탄에 맞아 혼수상태

  • 입력 2006년 6월 9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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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불 나는 세상이 물 속에 잠겼다/우리 아이가 익사했다/뜨거운 정열과 불타는 의지가 물 속에 잠겼다/우리 아이는 대학 3학년/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다 그만/짐승의 발톱에 물려 죽었다

우리는 분노한다/이 시대의 인간임을 포기하고 싶다/(후략)’

1987년 2월 연세대 2학년 이한열(李韓烈)이 쓴 ‘박종철’이란 제목의 습작시.

서울대 3학년이던 박종철(朴鍾哲)은 같은 해 1월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강제 연행돼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하다 숨졌다.

이한열은 ‘고 박종철 군 범국민 추도회’에 참가한 뒤 이 시를 썼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6월 9일.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린 그가 연세대 정문 앞에 서 있다.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를 가진 직후였다. ‘6·10대회’란 다음 날인 10일 열린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

전투경찰에 쫓겨 교문 안으로 들어가던 그가 직격 최루탄을 뒷머리에 맞고 쓰러졌다.

곧바로 병원 응급실에 옮겨진 그는 “뒷머리가 몹시 아프다. 온몸이 마비되는 느낌이다”고 말했다. 그것이 그가 분노하던 세상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약 30분 후 그는 의식을 잃었고 27일간의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의 시간은 정지됐지만 전국의 거리는 훗날 ‘6월 항쟁’이라 불릴 민주화 함성으로 가득 했다.

7월 5일 그가 영영 눈을 감자, 그동안 최루탄에 울던 거리는 슬픔으로 오열했다.

나흘 뒤 열린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은 연세대 본관→신촌로터리→서울시청 앞→광주 5·18묘역으로 이어졌다. 운구가 지나갈 때 길가의 시민들은 함께 울었고, 고층 사무실에서는 창문 밖으로 하얀 손수건을 흔들었다. 서울시청 앞 호텔들의 태극기도 학생들에 의해 조기(弔旗)로 내려졌다.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광주 50만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

“이한열 군의 죽음이 민주화로 가는 길목에서 ‘마지막 희생’이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똑같은 마음이다. (중략) 정치는 제발 더 이상 국민에게 눈물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최루탄에 의한 것이든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이든 간에 이제 ‘눈물과 한(恨)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

영결식 다음 날인 7월 10일 동아일보 사설의 일부이다.

이 사설의 희망대로 한국의 정치는 ‘눈물과 한의 시대’를 끝냈는가.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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