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12월 12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여류 비행사 박경원의 인터뷰 가운데 일부분이다.
일본에서 비행훈련 중이던 그는 비행사 자격증을 따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잠시 고국으로 돌아왔다가 앞서 자신의 이야기를 두 차례나 기사화했던 동아일보를 인사차 방문한 것이었다.
사실 그와 동아일보의 인연은 남달랐다.
간호사를 장래 희망으로 삼았던 박경원이 하늘을 나는 꿈을 품게 된 것도 1922년 동아일보 주최로 열린 한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의 고국방문 시범비행을 구경한 뒤였다.
‘여자라고 비행사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나도 비행기를 타고 꼭 하늘을 날고 말겠다.’
안창남의 비행에 매료된 박경원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선에서는 체계적인 비행 교육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25년 1월 도쿄(東京) 가마다(蒲田)에 있는 비행학교에 입학한 뒤 택시 운전 등으로 어렵게 학비를 조달하면서 이듬해 이 학교를 졸업하고 마침내 3등 비행사 자격을 땄다.
당시 비행사 급수는 세 가지로 나뉘었다. 20시간 비행경력의 3등 비행사는 자가용 비행기로 훈련장 주변만 비행할 수 있었다. 2등 비행사(50시간)는 비행구역에 제한이 없었고, 1등 비행사(100시간)는 영업용 비행기도 조종할 수 있었다.
박경원은 1928년 2등 비행사가 되는 등 여류 비행사로 승승장구했다. 혹독한 비행 훈련과정 때문에 일본에서도 2등 비행사 자격증을 딴 여성은 2명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조차 그의 열정과 노력에 감탄했다.
1933년 8월 7일. 박경원은 도쿄 하네다(羽田) 국제비행장에서 ‘청연(靑燕·푸른 제비)’호에 몸을 실었다. 고국방문 비행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륙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기상 악화로 추락하고 말았다. 서울에서 그를 기다리던 군중은 충격에 휩싸였다.
한국 최초의 민간인 여류 비행사였던 그의 짧고 운명적인 33세의 삶은 지난해 장진영 주연의 영화 ‘청연’으로 재조명됐다.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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