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93년 금융실명제 전격 시행

  • 입력 2006년 8월 1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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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1993년 8월 12일 목요일 오후 7시 45분경.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 및 비밀 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권’을 발동하면서 발표한 특별담화 중 일부.

YS는 금융실명제를 ‘온 국민이 기대해 온 개혁 중의 개혁’이라고 강조했다. 그 개혁은 철통같은 보안 속에 ‘혁명적’으로 단행됐다. YS 스스로 훗날 회고록에 ‘목요일 저녁의 충격’이라고 표현했을 정도.

YS는 같은 해 6월 하순 당시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에게 극비 작업팀을 구성할 것을 지시했다. YS는 실무진에 “목숨을 걸고 보안을 지키라”며 “기밀이 새면 전원 구속하겠다”는 엄명까지 내렸다는 후문.

국무총리, 대통령비서실장,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조차도 아무런 귀띔을 받지 못했다.

핵심 실무자들에게는 눈속임용 해외출장 명령이 내려졌다. 이들은 실제 공항에 나가 직원과 가족들의 환송을 받으며 출국했다가 몰래 다시 입국했다.

이들의 진짜 출장지는 금융실명제 준비 아지트였던 경기 과천시의 한 아파트.

실무진은 이 아파트에서 합숙하는 동안 △현관문을 나설 수 없다 △창문가에도 서면 안 된다 △집에 전화를 삼가되 통화할 경우 국제전화로 철저히 위장하라는 행동수칙까지 하달 받았다.

YS의 회고.

“실무진은 실명제 작업을 ‘남북통일 작전’이라고 불렀다. (아지트의) 집주인에게도 대학교수들이 남북통일 용역 연구를 수행한다고 둘러댔다.”

실명제 발표 전날인 8월 11일. 인쇄공 7명에게 비밀 서약서를 받은 뒤 밤새 자료를 인쇄했다. 철통같은 보안은 이렇게 지켜졌고 그 덕분에 YS식 혁명적 개혁도 일단 성공적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 뒤인 1997년 말 한국 경제를 송두리째 뒤흔든 외환위기가 닥쳤다. 얼마 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등은 ‘깜짝쇼 같았던 실명제 실시’를 외환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 꼽았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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