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낭인들에게 왕비까지 잃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급기야 궁녀의 가마에 몸을 숨기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고 말았다. 아관파천이다. 이로써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나라의 명운이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은 매일반이었다.
1년여 만인 1897년 2월 경운궁(慶運宮·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에게 조야(朝野)는 칭제건원(稱帝建元)할 것을 상소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 진보세력과 내각을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이 ‘나라의 위엄을 높이고 자주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같은 뜻을 밝혔다. 물론 내심은 서로 달랐지만.
고종은 아홉 번을 물리친 뒤 그해 10월 12일 마침내 회현방의 환구단((원,환)丘壇)에서 황제의 위에 올랐다. 아울러 국호를 ‘대한국(大韓國)’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했다.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을 아우르는 ‘큰 한’이라는 뜻에서 ‘대한’이요,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힘을 기르고 나라를 빛내자’는 뜻에서 ‘광무’였다.
칭제건원이 성공적으로 이뤄지자 독립협회 등은 의회 개설 운동을 벌였다. 황제는 황권에 대한 간섭과 견제로 보고 1898년 12월 독립협회를 해산했다. 이어 명실상부한 황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9년 8월 17일 ‘대한국 국제(國制)’를 반포했다. ‘대한국은 세계만국에 공인되온 바 자주독립하온 제국이니라’라고 한 제1조를 빼면 오로지 황제의 절대적인 권한만을 규정하는 내용이었다. 2조에서는 ‘대한국의 정치는 만세불변(萬世不變)하오실 전제정치’라고 밝히고 3조부터는 ‘무한한 군권(君權)’ ‘군권에 대한 도전 행위의 불용(不容)’ ‘육해군 통수권 및 계엄권’ ‘입법 사법권’ ‘행정명령권’ ‘관리의 임면권’ ‘외교권’ 등을 규정하였다.
민권은 없고 황권만이 존재했다. 갑오개혁 후 커 오던 민권의식의 싹을 잘라 버리는 조치였다. 거죽은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었으나 속은 전근대로 후퇴하는 내용이었다.
이 시기 조선의, 대한국의 염원은 자주독립이었다. 1876년의 강화도조약, 1895년의 홍범14조, 대한국 국제의 제1조는 모두 ‘자주’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제국이 스러지던 그날까지 자주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 이 땅에 휘몰아치는 자주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여규병 기자 3spring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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