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기자가 ‘일본으로 갔다’를 이렇게 표현했다면 동아일보 어문연구팀은 당장 날카로운 교열의 칼날을 휘둘러 ‘대한해협을 건넜다’라고 고쳐놓을 것이다.
현해탄은 일본 규슈(九州) 북서부 해역을 일컫는 ‘겐카이나다’를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한글학자들이 ‘현해탄을 건넌다’는 표현을 일부러 썼다.
조선어학회 사건 때 고초를 겪었던 이석린(李錫麟) 선생이 1993년 발간된 ‘조선어학회 수난 50돌 기념 글모이(문집)’에 남긴 회고담.
“우리 조선인이 ‘일본 간다’는 말을 ‘내지(內地)에 간다’고 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세상이니 딱한 일이다. 그래서 한글 잡지에도 ‘일본에 간다’를 ‘현해탄을 건넌다’라고 쓴 기억이 난다.”
당시 한글학자들의 딱한 사정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일제가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세워놓은 조선신궁을 참배해야 했고, 일본말로 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큰소리로 외워야 했다. 조선어학회조차 일제의 전시협력단체에 가입해야 했다.
이석린 선생은 온갖 수모를 참아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 죽지 못해서…. 어떡하든지 우리말의 명줄을 이어야 했다. 그것은 조선 민족이 조선어학회에 거는 바람이기도 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어학회는 그렇게 지켜낸 한글만 쓰기 운동을 적극 벌였다.
1948년 제헌헌법 정본이 한글로 쓰이게 된 것도 그 노력 덕분이었다. 한글이 태어난 지 500여 년 만에 국가 최고의 공용문서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조선어학회는 같은 해 7월 다음과 같은 ‘한글 전용법 제정 건의문’을 국회 문교후생위원회에 제출했다.
“훈민정음의 창제를 자주정신의 발로라고 한다면 국문헌법의 공포는 자주정신의 부흥을 뜻한다. 앞으로 모든 공용문서와 성명도 단연 우리 글로 써야 한다.”
두 달 뒤인 9월 30일. 국회 문교후생위는 토의 끝에 ‘대한민국의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는 한 문장짜리 한글전용법안을 성안했다.
그러나 다음 날 본회의 논의 과정에서 이 법안에는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는 꼬리가 붙는다.
이 단서 조항은 그 후 한글의 발목을 끊임없이 잡았고 조선어학회의 후신 한글학회는 ‘단서 없애기 운동’을 벌여야 했다. 한글의 수난은 현재진행형이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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