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 7주째인 1950년 10월 27일, 결국 영국 정보기관 MI5까지 나섰다.
폰테코르보 교수와 가족은 9월 초 휴가 때 고국 이탈리아를 거쳐 핀란드에 도착한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사회주의 신념이 확고했던 폰테코르보 교수가 아내와 세 아들을 데리고 소련으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미국과 영국 정보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스웨덴 스톡홀름발(發) 핀란드 헬싱키행(行) 비행기를 탔던 한 승객의 증언이 나왔다.
폰테코르보 교수 가족이 그 비행기에 함께 있었는데 교수의 아들 안토니오(당시 5세)에게서 소련으로 가는 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조지 스트로스 영국 군수부 장관은 하원에서 “폰테코르보 교수가 한동안 비밀정보 접근이 제한돼 있었으나 적에게 유용한 정보를 수집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폰테코르보 교수는 은둔 끝에 1955년 3월 소련에서 열린 한 기자회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서구 사회에서는 평화적인 목적의 원자력 사용에 관해서만 연구해야 했기 때문에 그곳을 떠났다”고 말했다.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전쟁에서는 핵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폰테코르보 교수는 소련 국영 신문 ‘프라우다’와 정부 기관지 ‘이즈베스티야’에 그와 가족들이 소련 망명을 승인 받았다는 글을 싣기도 했다.
훗날 영국 정부기록보관소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43년 교수의 집을 수색했을 때 공산주의 서적이 많이 발견됐는데도 행정적인 실수로 인해 그가 하웰 원자력연구소에서 비밀정보 취급 허가를 받게 됐다는 것.
소련 첩보조직 KGB가 폰테코르보 교수를 포섭한 것은 미국으로 망명한 이탈리아 출신 과학자 엔리코 페르미와 절친한 사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바 있는 페르미 교수가 1942년 미국 시카고대에서 제작한 최초의 원자로는 오늘날 원자력 발전소의 원형이 됐다.
폰테코르보 교수는 이탈리아 로마의 라사피엔차대에서 페르미 교수에게서 물리학을 배웠고 이후 그의 실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이런 관계 덕분에 폰테코르보 교수는 스승의 성공적인 핵반응 실험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소련에 제공하기도 했다. 정작 스승은 핵의 군사적 사용이 늘자 자신의 연구를 후회했는데도.
폰테코르보 교수는 1993년 파킨슨병으로 숨질 때까지 러시아 두브나의 합동 핵연구소에서 일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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