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2월 3일. 개각 후 신임 각료들을 위해 마련한 다과회 자리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건설부 장관에서 자리를 옮긴 장예준 신임 상공부 장관에게 이렇게 신신당부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장 장관은 나중에 “좁은 국토에 자원도 없고 세계 3위의 높은 인구밀도를 갖고 있던 우리나라에서 수출드라이브 정책의 최선봉에 섰던 국가 통치권자의 간절한 염원이 배어 있는 말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한국을 둘러싼 국제경제 환경은 좋지 않았다. 1973년 4차 중동전 발발로 아랍 산유국들이 미국 등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국가에 원유수출을 중단했고,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원유가를 배럴당 5.12달러에서 11.65달러로 128%나 인상했다. ‘오일 쇼크’로 세계가 몸살을 앓던 시기였다.
보호무역 추세가 강화되면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통상 마찰도 확대됐다.
그해 수출실적은 32억2500만 달러 정도. 나라 안팎의 경제 환경이 악화되는 시점에서 몇 년 안에 100억 달러를 돌파하라니….
하지만 한국은 마침내 1977년 12월 22일 수출 100억 달러 고지에 등정한다. 당초 목표를 4년이나 앞당긴 쾌거였다.
서독이 수출 10억 달러에서 100억 달러를 달성하는 데까지 11년, 일본이 16년 걸린 데 비해 한국은 7년 만에 돌파를 한 것이다.
철강 전자 선박 금속 기계류 등 중화학 제품 수출이 100억 달러 돌파에 크게 이바지했고 때마침 일어난 중동건설 경기 붐으로 해외건설 수주가 급증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1977년 12월 22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4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박 대통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감격을 표현했다. 수출의 날은 처음 1억 달러 수출을 돌파한 1964년 만들어졌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수출 100억 불을 돌파했습니다. 그동안 우리 국민 여러분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오직 부강한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일념으로 묵묵히 땀 흘리며 매진해 온 지난 일들을 회상하면서 가슴 벅찬 감회를 누를 길이 없습니다.”
흑백 TV로 이날 기념식 장면을 본 기억이 아스라한데 올해 한국이 수출 3000억 달러를 넘어섰다고 한다. 1조 달러를 돌파할 날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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