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84년 英서 페이비언협회 창립

  • 입력 2007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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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단체는 자신들이 꿈꾸는 바를 이름에 담았다. ‘페이비언(Fabian)’이라는 이름은 로마의 명장 파비우스(Fabius)에서 따왔다. 파비우스는 성문을 꼭 걸어 잠근 채 끈기 있게 버티는 지구전법으로 유명한 장수다. 파비우스가 그러했듯 페이비언 협회도 급진적인 혁명이 아니라 끈기 있는 개혁으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이상을 갖고 출발했다.

1884년 1월 4일 영국 런던에서 페이비언 협회가 창립됐다. 1년 전에 만들어진 신생활회(The Fellowship of New Life)에서 갈래를 친 단체였다. 청빈한 삶의 모델을 제시해 사회를 바꿔 보자는 신생활회의 목표에 대해 몇몇 회원은 정치적인 개혁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따로 모여 페이비언 협회를 만든 것. 협회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가장 오래된 사회주의 싱크탱크라는 영예를 얻었다.

극작가이자 비평가인 버나드 쇼, SF의 고전 ‘우주전쟁’의 작가 H G 웰스,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시드니 웨브, 정치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그레이엄 월러스…. 창립 멤버들부터 ‘드림팀’이었다. 1889년 7명의 회원이 필자로 참여한 ‘페이비언 사회주의’(고세훈 옮김·아카넷)에는 이 단체의 이상이 집약돼 있다. 책에 따르면 페이비언 협회의 목적은 ‘토지와 산업자본을 개인과 계급 소유에서 해방시키고, 보편적 이익을 위한 공동체 소유로 전환시켜 사회를 재조직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정신을 분명하게 표방했지만 혁명적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국가의 중립성,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끈기 있게 낙관한다는 점에서 페이비언 협회는 다른 사회주의 단체와 뚜렷하게 구별된다. ‘개량주의’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버나드 쇼는 “형이상학적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전혀 없고, 영웅적 패배보다는 지루한 성공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설파하기도 했다.

창립 멤버들이 기대했던 정치적인 개혁 요구에 맞춰 페이비언 협회는 1900년 영국 노동당 창당에 관여했다. 또 100년 넘게 출판과 세미나, 대규모 집회 등을 통해 사회주의 이론과 정책에 관한 논의를 활발하게 펼쳐 왔다. 현재 회원은 7000여 명. 토니 블레어 총리를 비롯해 영국 노동당 정치지도부 대부분이 페이비언 협회 출신이고 아직도 노동당의 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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