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에도, 땡볕이 내리쬐는 폭염에도 매주 수요일 정오만 되면 그들은 어김없이 나타났다.
벌써 15년이다. 학교를 다니든, 교회에 나가든 15년을 개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이 일흔이 넘은 노인들이라면 더 그렇다.
하지만 상을 드리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한결같이, 오래 했다고 결코 축하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은 벌써 700여 차례나 외쳤지만 그때마다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수요 집회의 시작은 평범했다.
1992년 1월 8일 수요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일본대사관 앞.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20여 명이 이곳에 모여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 등을 요구했다.
물론 이날은 ‘첫 수요 집회’라는 타이틀로 모인 게 아니었다. 위안부 문제를 일본과 대중 앞에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본대사관은 묵묵부답이었다. 오기가 생겼다고 할까. 문제 해결을 위해 계속 집회를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 뒤로 집회는 매주 열렸다. 공휴일일 때와 1997년 일본 고베(神戶) 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는 것으로 시위를 대신한 것만 예외였다.
지금까지 집회 참가자는 연인원으로 3만여 명. 학생과 시민, 세계 각국의 인권운동가들은 물론 양심적 일본인들까지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처음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얼굴을 가리던 할머니들이 이젠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강주혜 사업국장의 말이다.
이제 그들은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집회를 본 외국인들은 “우울한 주제를 갖고 이렇게 활기차게 시위를 한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입을 모은다.
문제는 집회에 참석했던 할머니들이 한(恨)을 풀지 못한 채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는 점. 지금까지 정부에 피해자로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 234명 중 111명이 사망했다.
동료가 쓰러질 때마다 이들의 의지는 더 단단해진다. “우리가 죽고 사라져도 역사는 살아 있다”고 외친다. 하지만 역사의 증인들이 있고 없고는 분명 중요한 문제다.
한일 양국 정부는 할머니들이 늙지도 않을 거라 믿는 걸까. 위안부 문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