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97년 리핀스키 세계피겨 최연소 우승

  • 입력 2007년 3월 2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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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빛나는 금발을 날리며 빙판을 돌 때 사람들은 환호했다. 결승에 오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만큼 어린 선수의 뛰어난 연기에 대한 놀라움은 더했다.

1997년 3월 22일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미국 선수 타라 리핀스키가 우승했다. 열네 살 10개월의 나이, 대회 사상 최연소 우승자였다.

리핀스키가 스케이트화를 신은 것은 세 살 때. 처음엔 롤러스케이트였다. 꼬마는 스케이트를 무척 좋아했고 유아들이 출전하는 대회에 나가 우승하기도 했다. 그는 여섯 살 때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했고, 맹훈련을 받으면서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렇지만 리핀스키를 스타로 만들어 준 1997년 대회 우승은 뜻밖이었다. 잘 하는 선수이긴 했지만 아직 어리다는 게 중론이었다. 이런 주변의 우려를 도리어 어리기 때문에 어필할 수 있는 깜찍한 연기로 확실하게 잠재웠다.

이듬해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놓고 미셸 콴과 벌인 대결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그보다 두 살 위인 콴이 우아하고 부드러운 동작을 선보였을 때 감동한 관중은 “완벽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때 대기실에서 리핀스키는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어쩌면 그냥 집에 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이 졸아들었다. 그렇지만 이 소녀가 마음을 비우고 빙판 위에 오르자 역전극이 시작됐다. 리핀스키는 콴처럼 단정하진 않았다. 그는 빙판 위에서 과감하게 뛰어올랐고 신나게 춤을 췄다. 콴이 나왔을 때 숨죽였던 관객들은 리핀스키의 연기에 어깨를 들썩였다. 금메달을 목에 건 사람은 리핀스키였다.

삽시간에 스타가 된 리핀스키는 올림픽 출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 전향을 선언한다. “우승만을 위한 연습 대신 가족, 친구들과 시간을 좀 더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의 삶 대부분을 스케이트 대회 준비만 하면서 지냈으니 10대 소녀로선 당연한 바람이었다.

한편으로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혹독한 훈련과 잦은 경기를 감내했던 리핀스키는 부상 때문에 몸이 말이 아니었다. 결국 은퇴한 뒤 영화배우로 나섰다. 사람들은 통통 튀는 요정 같았던 그의 빙판 위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한다. 한편 리핀스키의 은퇴를 계기로 국제빙상경기연맹(ISU)은 어린 선수들이 예술성을 추구하기보다 작은 체구를 이용한 점프 기술 연마에만 치우치기 쉽다며 올림픽 출전 연령에 제한을 뒀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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