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프로그램 제조회사를 혼내 주려고요. 내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돼 백신 프로그램을 샀는데 제대로 치료가 안돼 화가 났어요.”(범인)
수백만 대의 세계 컴퓨터를 마비 상태에 빠뜨린 주범은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평범한 젊은이였다.
주인공은 천잉하오. ‘사고’를 친 것은 대만 다퉁(大同)대 4학년 때인 1998년 4월이었다.
그는 하드디스크를 파괴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만든 뒤 자신의 고등학교 번호 26을 연상해 활동일을 4월 26일로 정했다. 이름은 자신의 영문 이니셜을 따 ‘CIH바이러스’라 붙였다.
공격 대상은 윈도95와 윈도98을 운영체제로 사용하는 컴퓨터. 바이러스는 인터넷을 통해 내려받는 파일에 첨부되는 방식으로 유포됐다.
이 바이러스는 감염 대상 컴퓨터에 일단 잠복해 있다가 1999년 4월 26일 0시를 기해 활동을 시작했다. 컴퓨터를 켜는 순간 하드디스크 안에 있는 데이터가 몽땅 날아가 버렸다.
세계는 큰 혼란에 빠져 들었다. 정부, 금융기관, 일반 기업체, 가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컴퓨터가 갑자기 꺼지거나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데이터가 모두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금융기관의 중요 업무가 마비되기도 했다.
언론에선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일어난 1986년 4월 26일과 연관지어 ‘체르노빌 바이러스’라는 명칭을 지어냈다.
당시 국내 피해 규모는 데이터가 손상된 컴퓨터 24만 대에 피해액 2400억 원 정도로 추산됐으나 실제 피해액은 이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만 경찰은 사건 발생 사흘 만인 29일 천잉하오를 잡았지만 그는 실형을 살지 않고 나중에 컴퓨터 회사에 취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CIH는 수년간 악성 바이러스의 대명사로 활동했으나 윈도95나 98 사용자들이 줄어들고 치료 백신이 개발되면서 지금은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1980년대 중반 마이크로소프트사의 MS DOS를 운영체제로 하는 컴퓨터가 최초로 바이러스 공격을 받은 이래 바이러스는 더욱 정교해지면서 다양화되는 추세다.
이를 치료하는 백신 프로그램도 발전되고 있으나 천잉하오와 같은 이들이 존재하는 한 ‘창(바이러스)’과 ‘방패(백신)’의 대결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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