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다. 이곳은 임금에게서 6개월에서 1년간 특별히 독서휴가를 받았던 공무원(관리)들이 책을 읽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를 통해 바쁜 업무 때문에 자기계발을 게을리 하는 관료들을 경계했다.
“학문에 큰 뜻을 둔 선비가 직책에 얽매여 있으면 글에 전념할 수가 없다. 그들이 멀고 큰 뜻을 방해받게 된다면 이는 결코 내가 선비를 불러들여 도움을 구하는 도리가 아니다. 나이 젊고 재주 있는 자에게 특별히 여가를 주어 산방에 나아가 독서하게 하라.”
독서를 즐겼던 성종은 1476년 6월 4일 세종 때 행해지던 ‘사가독서제’를 부활시켰다. 처음에 문신들의 독서는 주로 가정이나 빈집에서 이뤄졌다. 당시 서거정은 다음과 같은 건의를 올렸다.
“휴가를 주어 독서를 하는 문신들이 도성 안 여염집에 자리를 잡으면 필시 사귀는 벗들이 찾아와 만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신이 세종 때에는 신숙주 등과 함께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었습니다.”
이후 독서는 용산사 등 주로 사찰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숭유억불’ 정책을 썼던 성종은 “학성인이 어찌 사찰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겠는가”라며 별도의 ‘독서당’을 짓도록 했다.
‘독서휴가’를 받은 인물이라고 해서 편한 것은 아니었다. 매월 세 번 글짓기를 통해 과제시험을 치렀으며, 성종이 불시에 내관을 보내 독서 결과를 하문했다. 그러나 의복과 음식, 어주까지 내리며 격려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성종 당시 사가독서를 한 문신들은 10대가 1명, 20대가 12명, 30대가 7명이었다. 과거에 막 합격한 젊은이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대부분 투옥되거나 사형됐다. 강흔, 신용개, 조위 등은 투옥됐으며 권경유, 권오복, 김일손 등은 사형을, 조지서와 최부는 참수형을 당했다.
성종은 경국대전,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향약집성방, 국조오례의, 악학궤범 등 다양한 분야의 유교사상을 집대성했다. 사가독서자들은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아래서 비운의 길을 걸었으나 성종의 치적에 많은 공을 세운 인물들이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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