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476년 성종 ‘사가독서제’ 부활

  • 입력 2007년 6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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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약수동에서 성동구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길을 ‘독서당 길’이라고 부른다. ‘독서당’에서 독서를 했던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요즘처럼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취직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었을까?

아니다. 이곳은 임금에게서 6개월에서 1년간 특별히 독서휴가를 받았던 공무원(관리)들이 책을 읽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를 통해 바쁜 업무 때문에 자기계발을 게을리 하는 관료들을 경계했다.

“학문에 큰 뜻을 둔 선비가 직책에 얽매여 있으면 글에 전념할 수가 없다. 그들이 멀고 큰 뜻을 방해받게 된다면 이는 결코 내가 선비를 불러들여 도움을 구하는 도리가 아니다. 나이 젊고 재주 있는 자에게 특별히 여가를 주어 산방에 나아가 독서하게 하라.”

독서를 즐겼던 성종은 1476년 6월 4일 세종 때 행해지던 ‘사가독서제’를 부활시켰다. 처음에 문신들의 독서는 주로 가정이나 빈집에서 이뤄졌다. 당시 서거정은 다음과 같은 건의를 올렸다.

“휴가를 주어 독서를 하는 문신들이 도성 안 여염집에 자리를 잡으면 필시 사귀는 벗들이 찾아와 만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신이 세종 때에는 신숙주 등과 함께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었습니다.”

이후 독서는 용산사 등 주로 사찰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숭유억불’ 정책을 썼던 성종은 “학성인이 어찌 사찰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겠는가”라며 별도의 ‘독서당’을 짓도록 했다.

‘독서휴가’를 받은 인물이라고 해서 편한 것은 아니었다. 매월 세 번 글짓기를 통해 과제시험을 치렀으며, 성종이 불시에 내관을 보내 독서 결과를 하문했다. 그러나 의복과 음식, 어주까지 내리며 격려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성종 당시 사가독서를 한 문신들은 10대가 1명, 20대가 12명, 30대가 7명이었다. 과거에 막 합격한 젊은이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대부분 투옥되거나 사형됐다. 강흔, 신용개, 조위 등은 투옥됐으며 권경유, 권오복, 김일손 등은 사형을, 조지서와 최부는 참수형을 당했다.

성종은 경국대전,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향약집성방, 국조오례의, 악학궤범 등 다양한 분야의 유교사상을 집대성했다. 사가독서자들은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아래서 비운의 길을 걸었으나 성종의 치적에 많은 공을 세운 인물들이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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