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에 불이 붙었다. 1960년대, 세계는 여성해방운동이라는 새로운 봇물과 만났다.
1960년대는 모든 것이 넘쳐흘렀다. 자본의 파이는 커져 갔고, 냉전의 총칼은 날이 섰다. 물질적 여유와 정신적 공황이 혼재했다. 흑인 반전 평등…. 사회적 약자들은 더는 단역이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삶을 스스로 결정하길 원했다.”(사라 에번스)
여성 또한 그랬다. 산업과 교육의 확대는 차별에 눈뜨게 했다. 똑같이 일하는데 임금은 적게 받다니. 2등 시민도, 노무보조도 거부했다. 남녀 차별이라는 ‘역사상 가장 소홀하게 취급된 질병’(마드모아젤 지)에 메스를 대기 시작했다.
1969년 ‘레드 스타킹 선언’은 호쾌한 펀치였다. “무엇이 혁명적이고 무엇이 혁신적인지 묻지 않겠다. 무엇이 여성을 위한 것인가를 묻겠다.” 여성해방은 어떤 사상보다도 우선한다고 믿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브래지어를 입었다는 것이다.”(주디 로스)
물결은 커져 갔다. 드디어 유엔이 멍석을 깔았다. 1975년 6월 19일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 138개국 2000여 명이 참석한 ‘제1회 세계여성대회’가 개최됐다.
대동단결은 험난했다. 정치와 남성의 그림자가 대회 내내 어른거렸다. 이스라엘 총리 부인의 연설 땐 중동 대표 100여 명이 퇴장했다. 35명의 최고위 가운데 34명이 남성? 멕시코는 대표도 남성을 보냈다.
하지만 ‘평등 발전 평화’(대회 슬로건)를 향한 숨결은 서툴러도 뜨거웠다. 낙태 반대부터 경제 차별, 가족 문제까지. 2주 동안 다양한 논의가 오갔다. 미스와 미세스의 나눔을 거부한 호칭 ‘미즈’의 결정은 멋들어진 피날레였다.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의 등장은 열광의 정점이었다. ‘한국 여성운동의 대모’인 이효재 교수도 참석했다. ‘화려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도 당시엔 함께 손을 잡았다.
세계여성대회는 계속됐다. 1980년 덴마크 코펜하겐, 1985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도 모였다.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선 ‘성은 이제 섹스(sex)가 아닌 젠더(gender)’임을 천명했다. 21세기의 세계여성대회는 어떤 논의로 뜨거울는지.
“여성운동은 남성해방, 인간해방과 같은 말이다.”(린지 저먼)
차별과 평등은 모두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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