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락에선 보이지도 않는다. 정상에 올라야 턱 하고 펼쳐진다. 그래서 하늘에 떠 있는 ‘공중 도시’라고 불렀다던가. ‘태양의 아들(잉카)’이 남긴 마지막 숨결.
마추픽추.
토착어로 ‘나이 든 봉우리’. 우아이나픽추(젊은 봉우리)와 연결된 계곡에 자리했다. 첫 발견자인 미국 탐험가 하이럼 빙엄이 물었다. “이 도시의 이름이 뭔가?” 영어를 알 리 없는 농부의 대답. “저 산은 노봉(老峯)이오.”
건설 추정 연대는 16세기. 정복자의 군홧발을 피해 마련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거처였단 설이 유력하다. 그러하나 까닭 모를 연유로 잉카인들은 곧 도시를 떠나고…. 1911년 7월 24일, 약 400년 만에 빙엄이 멈춰 버린 시간의 문을 열어젖혔다.
마추픽추는 발견 당시부터 의문투성이였다. 조사할수록 이상했다. 당시 기술로 해발 2280m 고지대에 어떻게 석조 도시를 지었을까. 남성은 어디 가고 170여 구의 여성 미라만 남았을까. ‘테트리스’처럼 짜 맞춘 돌담은 돌망치도 쓰지 않고 쌓아 올린 것이다. 외계인의 지상기지란 추측도 나왔다.
현대 과학도 풀지 못한 마추픽추는 잉카 문명의 산실이었다. 완벽한 계획도시. 급조한 피난처가 아니라 2만 명이 살 수 있는 터전이었다. 계단식 경작지로 식량도 충분히 확보했다. 지금도 마르지 않는 관개수로까지 구비했다.
잉카의 위대함은 국가 운영에서 더욱 확연하다. 중앙집권제를 바탕으로 지방자치도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평민을 위한 사회보장이 완비돼 ‘신권 사회주의’ ‘잉카 사회주의’라 불렸다. 전성기 땐 탁월한 역참(驛站)망으로 1200만 명의 복속 주민을 거느렸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던 돌담은 엉뚱한 곳에서 무너졌다. 고산동물 라마와 성교하던 습속이 매독을 성행시켰다. ‘신의 얼굴’이라 찬양했던 스페인은 황금에 눈이 먼 악마였다. 학살과 전염병. “황금 문명을 이룬 색채의 마술사”(‘세계문화기행’)는 그렇게 사라졌다.
척화(斥和)한들 버텼을 리 없었겠지만, 괜한 길을 열었다가 울창한 숲마저 건사하질 못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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