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폭탄선언이었다.
1969년 7월 25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길. 괌의 앤더슨 공군기지에 들른 닉슨 대통령은 백악관 수행기자단과의 비공식 회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참석자들은 귀를 의심했다. 바로 몇 시간 전 태평양 해상의 항공모함 호닛 함교에서 열린 아폴로 11호 승무원 귀환 환영 행사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닉슨 역시 자못 고무된 상태였다. 미국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함으로써 우주 경쟁에서 소련을 제칠 수 있는 전환점이 마련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계속됐다.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에 너무 의존하는 나머지 지금 베트남에서 겪고 있는 그런 전쟁에 우리가 또다시 휘말리는, 그런 정책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이어 그는 “동맹국에 안보조약의 의무는 지키겠지만 핵 공격을 제외한 외부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1차적인 방위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냥 미국에 의존하지 말고 자국의 안보는 스스로 챙기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괌 독트린’ 또는 ‘닉슨 독트린’으로 불리게 된 닉슨의 새로운 아시아 정책은 곧 ‘베트남화(Vietnamization)’로 이름 붙여진 전략으로 구체화됐다. 베트남전쟁은 프랑스 남베트남 군인에게 떠맡기고 미국은 빠지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닉슨의 아시아 순방이 계속되는 동안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은 프랑스 파리에서 북베트남 대표와 비밀리에 만나 평화협상에 착수했다. 닉슨은 훗날 회고록에서 “아시아 순방 일정 자체가 비밀 평화협상을 감추기 위한 ‘완벽한 위장’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이 같은 정책 전환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미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인의 염증이 곳곳에서 반전 시위로 나타났고 닉슨 역시 대선 캠페인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약속한 터였다.
닉슨 독트린은 베트남에 그치지 않았다. 특히 한국에 미친 여파는 충격적이었다. 이 노선은 한국 안보의 한국화(Koreanization), 즉 주한미군 감축으로 이어졌고 닉슨은 미군 1개 사단을 철수시켰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에 이를 갈며 이른바 자주국방 노선을 추진했다.
이라크전쟁으로 다시 ‘제2의 베트남전쟁’ 수렁에 빠진 오늘날의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전쟁의 이라크화(Iraqization)를 위해 일단 미군 병력을 증강시켰지만 결국 ‘체면을 지킨 퇴각이냐, 아니면 굴욕적인 패퇴냐’의 기로에 서 있는 듯하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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