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사회는 해 뜨면 나가 일하고, 해 지면 들어와 쉬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1897년 7월 27일 서울 종로 시내에 처음으로 석유로 불을 붙이는 가로등이 등장한 이후로 생활시간의 개념이 바뀌었다. 휴식의 시간이었던 밤이 활동의 시간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당시 서대문 밖 독립관에서는 ‘가로등을 다는 문제에 대하여’라는 개화파 인사들의 토론회가 있었다. ‘가로등을 켜면 도적이 없어진다’는 주장과 ‘관 쓴 백주 도적(관리)이 가로등 무서워 가렴주구 못하겠느냐’는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석유등에 이어 가스등, 전등으로 바뀌어 간 가로등은 사람들의 밤 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사랑방에서 호롱불을 밝히며 투전판을 벌이던 남정네들은 대낮처럼 환한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전등을 보러 일부러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도 많았다.
“밤마다 종로에 사람이 바다같이 모여서 구경하는데 전차표 파는 장소를 보니 장안의 남자들이 아홉시가 지난 후에 문이 미어질 정도로 새문 밖에 갔다 오는 표를 주시오, 홍릉 갔다 오는 표를 주시오 하면서 다투어 가며 표를 사 가지고 일없이 갔다 왔다 하니….”(‘제국신문’ 1900년 4월 14일자)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가로등은 어둠을 밝히고 도둑을 예방하는 기능에서 더 나아가 상업 활동과 도시경관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백열등에 갓을 씌운 우리나라의 가로등도 1963년 수은등으로 바뀌었고 1982년 통행금지 해제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가로등도 차가운 희뿌연 색의 수은등에서 노란색 나트륨 등으로 교체되고 있다. 세계적인 나비학자 게르하르트 타르만은 흰색 수은 가로등이 나비를 유혹하는 자외선을 발생시켜 나비를 떼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나트륨 등으로 교체하는 운동을 벌여 왔다. 김광균의 시 ‘와사등’, 영화 ‘가스등’처럼 가로등은 수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돼 왔다.
“가로등이 좋아지는 것은 역시 겨울철이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밤에 설레는 눈발 속에서 우러러보는 등불. …그러나 요즘은 눈 오는 밤 가로등에 기대 보는 그런 ‘고독한 낭만’조차 잊은 지 오래다.”(박목월 수필 ‘가로등’)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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