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도심을 달렸다. 양정고보를 출발해 남대문, 동대문, 돈화문, 광화문 등을 거쳐 경성부청(현 서울시청)으로 뛰고 또 뛰었다. 매일 거르는 법이 없었다.
“일본 선수들은 도쿄에서 돈과 지도자의 힘을 빌려 별별 준비를 다했지만 나는 추우나 더우나 혼자 달려 보는 것뿐이었다.”
차별과 핍박 속에 살아 온 식민지 청년은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면 동상을 세워 준다는 말을 들었다.
“미미한 조선 사람이 맨발과 빈주먹만으로 세계를 향해 싸운 승리의 기록을 가질 수 있다면 오죽이나 장한 일일까.”
1932년 가을 동대문운동장에서 연습하던 청년은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권태하가 미국에서 보낸 편지였다.
“세계의 마라톤 수준이 별것 아니더라. 자네는 특출한 소질을 지녔으니 열심히 달려 베를린 대회를 제패하게.”
동지(同志)의 기개(氣槪)가 통했을까. 편지를 받아든 청년은 고무됐다.
도전은 결실을 보았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날아온 승전보는 목청껏 ‘만세’를 외치고 싶어 하던 한반도인을 울렸다. 2시간 29분 19초 2.
‘그대들의 첩보(捷報)를 전하는 호외 뒷장에/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이천삼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심훈 ‘오오, 조선의 남아여!’ 중)
청년은 멈추지 않았다. 1950년 미국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는 그가 길러낸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각각 1, 2, 3위 결승선을 끊는 감격스러운 장면을 연출했다.
56년 뒤인 1992년 8월 9일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해 ‘몬주익의 영웅’이 됐다.
주린 배를 움켜쥔 한 식민지 청년의 도전에서 시작된 ‘민족의 거대한 드라마’는 슈테판 뮐러의 ‘어느 독일인이 본 한국인’이란 글에서 생생히 재연된다.
우리가 영웅을 기리는 것은 그의 정신 때문이다. 2002년 작고 전까지 손기정은 조국 청년의 스러져 가는 도전 정신을 안타까워했다.
“나는 배만 부르면 항상 1등을 했다. 지금은 배가 부르면 뛰지 않는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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