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04년 제2인터내셔널 6차 회의

  • 입력 2007년 8월 14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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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서로 전쟁을 하지만 국적이 다른 사회주의자들은 동지애를 바탕으로 세계 평화를 지향합니다.”

의장의 말이 끝나자 한 러시아인이 일어나 자그마한 체구의 일본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환호하는 25개국 대표들 앞에서 두 사람은 뜨겁게 서로를 껴안았다. 이 모습을 담은 사진은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적 사회주의’의 상징이 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1904년 8월 14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 6차 회의에는 러시아 사회주의자 대표 게오르기 발렌티노비치 플레하노프와 일본 대표 가타야마 센(片山潛)이 함께 참석했다.

플레하노프는 ‘공산당 선언’을 러시아어로 처음 번역하고 10월 혁명을 촉발시킨 신문 ‘이스크라’의 편집장을 지내는 등 러시아 사회주의자의 스승으로 불리는 인물.

가타야마 또한 미국 예일대에서 신학을 전공한 뒤 일본 근대노동조합 결성운동에 뛰어들어 사회민주당을 창립한 일본 사회주의자 1세대 대표이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격렬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두 나라에선 지식인과 대다수 국민 사이에 광적인 애국주의가 퍼져 갔다. 러시아 뒤에는 프랑스가, 일본 뒤에는 영국이 있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적국의 사회주의자 대표가 만나 손을 잡은 것은 국민의 맹목적인 애국심을 부추기며 커져만 가던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 야욕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이날 모인 각국 대표들은 “노동자에겐 조국이 없다”는 ‘공산당 선언’의 강령에 따라 러-일전쟁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채택했다. 이들은 향후의 모든 침략전쟁에 반대 의견을 밝히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이 결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각국의 사회주의자 대표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울 것을 다짐했다. 플레하노프도 프랑스 사회당과 조국 러시아를 위해 연합국 편을 들었다. 가타야마는 훗날 러시아로 건너가 스탈린 체제에서 관료를 지내며 러시아를 ‘이념의 조국’으로 삼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념과 가치가 부침을 거듭했지만 조국과 민족의 힘은 오히려 강해지고 있다. 쿠르드족 항쟁, 바스크 독립운동, 코소보 사태가 바로 그런 예다. 최근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 워’가 국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민족’ 때문일까.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모양이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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