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10분이었다. 시승열차 1호는 예정대로 서울 청량리역을 출발해 서울역에 이르는 지하철 1호선 종로선 구간(9.54km)을 달렸다.
광복절의 지하철 개통식은 화려하게 치러져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촐하게 치러졌다. 테이프 커팅을 하기로 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 개통 직전에 박 대통령에 대한 저격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일 청와대 대변인의 발표 내용.
‘괴(怪)청년 한 명이 15일 오전 10시 20분 국립국장에서 거행 중인 광복절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낭독하던 대통령을 저격했으나 좌절됐으며 저격범은 현장에서 즉각 체포됐다.’
사실 박정희 정권과 지하철의 ‘악연(惡緣)’은 1년 전부터 시작됐다. 남한보다 1년 앞선 1973년 9월 북한 평양에 먼저 지하철이 개통됐기 때문이다.
북한 전문가들 가운데에는 지하철 1호선을 체제경쟁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마치 냉전이 한창이던 1957년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리자 이듬해 초 미국이 부랴부랴 익스플로러 위성을 띄운 것처럼.
지하철 1호선은 많은 화제를 남겼다.
우선 공사기간에서 당시 기준으로 최단 기록을 세웠다. 착공에서 개통까지 걸린 기간은 3년 4개월. 같은 길이의 일본 오사카 5호선 공사는 5년이 걸렸다. 공사비도 km당 30억 원으로 앞서 개통된 런던(52억 원), 도쿄(89억 원)보다 적었다.
대통령 저격사건이 있었지만 지하철 개통은 시민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거리 곳곳에 축하 현수막이 나부꼈고 시민들은 ‘땅 밑으로 다니는 기차’를 보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몰려들었다. 본보는 지하철역 분위기를 ‘지하(地下) 서울에 지상(地上)의 탄성’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도 오래갈 수 없었다. 비보(悲報)가 전해진 것은 오후 7시였다.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머리에 총을 맞은 육영수 여사가 숨을 거둔 것. 들떴던 분위기는 어둠과 함께 비탄(悲嘆)으로 바뀌어 갔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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