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39년 독일-소련 상호불가침 조약

  • 입력 2007년 8월 23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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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일주일 전인 1939년 8월 23일 소련 모스크바에서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밀약이 이루어졌다. 독일과 소련이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한 것. 독일 외상 요아힘 리벤트로프와 소련 인민위원회 의장 겸 외무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상호불가침, 한쪽이 제3국의 공격을 받을 시 제3국 원조 금지, 상호 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에 합의했다. 이로써 독일은 영국 프랑스 등을 상대로 벌일 전쟁에 앞서 든든하게 뒷문을 단속할 수 있었고 소련은 호시탐탐 노리던 폴란드로의 영토 확장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이는 서방 국가의 허를 찌른 사건이었다. 애초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으로 하여금 독일을 견제하게 할 계획이었다. 독소 양국은 정치적 사상적으로 서로를 용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소련의 사회주의자들은 공개적으로 나치즘을 비롯한 파시스트 체제를 척결 대상으로 선언했고 히틀러 역시 집권 후 대대적인 공산주의자 탄압 정책을 펼치면서 양국의 관계는 험악할 대로 험악해져 있었다.

그러나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되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한 달 후 독일과 소련의 군대가 폴란드를 점령할 때 영국과 프랑스는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현실 정치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것을 이들은 간과했다. 2년 뒤 또 한번의 반전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이른바 ‘바바로사 작전’이었다.

불가침조약의 효력 기간은 10년으로 아직 8년이 더 남아 있었다. 침공 동기는 아직까지도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독일이 소련의 광대한 곡창지대와 유전 등을 노렸다는 것이다. 2년 전 체결한 불가침조약은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우방’으로 믿은 독일의 침공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소련의 처지는 궁색했다. 스탈린은 “적에게 단 한 대의 기관차도, 단 1파운드의 곡식도, 1갤런의 연료도 남겨 주어서는 안 된다”며 모든 물자를 처분하는 청야(淸野)작전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350만 병력의 독일군은 불과 3개월 만에 수도 모스크바 근교까지 진격했고 이번에는 스탈린이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4년간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무려 2500만 명의 자국인이 희생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악(惡)과 맺은 동맹은 더더욱 영원할 수 없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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