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공군 비행장 공사에 강제 징용됐던 강이순(85) 씨는 고국으로 향하던 1945년 8월 24일을 그렇게 회상했다. 강 씨는 구조됐지만 동료 징용자 5000여 명(생존자 주장)에겐 귀국길이 황천길이었다. 광복된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일본 수송선 우키시마(浮島·4730t)호는 22일 밤 아오모리(靑森) 현 해군기지에서 부산으로 출항했다. 한국인 노동자 7000여 명(생존자 추정)의 마음은 벌써 고국에 가 있었다. 그러나 배는 이틀 뒤 교토(京都) 마이즈루(舞鶴) 항을 지나다 갑자기 폭발했다.
일본 정부는 “미군이 설치한 기뢰에 걸려 배가 폭발했으며 한국인 송환자 3635명 중 524명과 일본 해군 승무원 25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인 생존자들의 증언은 달랐다. “부산에 도착하면 한국인에게 보복당할 거란 두려움에 일본 장교들은 미리 대피하고 폭파시킨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선체 인양 조사 결과 ‘자폭’ 가능성을 시사하는 증거도 나왔다. 기뢰로 인한 침몰이라면 선체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구멍이 뚫려야 하는데 실제론 안에서 밖으로 구멍이 나 있었던 것.
일본 정부는 이런 의문에 답하지 않고 있다. 또 자국 사망자들은 전사자로 대우하면서도 한국인에겐 일체의 보상도 하지 않았다. 생존자와 유족들이 1992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일부 승소했지만 2심과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결국 졌다.
사건 책임을 통감한 쪽은 일본의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교토 시민단체들은 종전 50주년을 기념해 우키시마호 사건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아시안 블루’란 영화를 만들었다. 또 사고가 발생했던 마이즈루 만 언덕에 추모비를 세워 매년 8월 24일 한국인 원혼들을 위로한다.
한국 내 사정은 어떨까. 유족들이 힘겨운 투쟁을 이어 왔지만 관심을 끌지 못했다. 정부도 유골 송환은커녕 진상 규명 요구에 ‘조사 중’이란 말만 10년 째 반복하고 있다.
우키시마는 ‘떠 있는 섬’이란 뜻이다. 62년이 흐른 지금도 이 사건은 원한과 의혹의 바다에 외롭게 떠 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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