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2003년 블레어 영국총리, 법정서다

  • 입력 2007년 8월 28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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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8월 28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법정에 섰다.

“BBC 보도가 사실이었다면 나는 사임했을 것이다.”

“취재원을 보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민을 호도해서는 안 된다.”

2시간 남짓 진행된 블레어 총리의 법정 증언은 이른바 ‘켈리 게이트’의 정점을 장식했다. 그와 BBC가 각각 영국 총리직과 세계 최고의 공영방송이라는 자존심을 걸고 벌인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였다.

켈리 게이트는 영국의 이라크전쟁 참전과 관련한 BBC의 보도가 발단이 됐다.

2003년 5월 29일 BBC 국방 담당 앤드루 길리건 기자는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서 익명의 취재원의 말을 인용해 “영국 정부가 이라크전쟁의 명분으로 발표한 이라크 대량살상무기(WMD) 보고서는 그럴싸하게 과장된(sexed up)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어 6월 1일에는 “앨러스테어 캠벨 총리공보수석이 ‘이라크는 45분 만에 WMD를 쏠 수 있다’는 내용을 보고서에 넣도록 정보기관에 압력을 넣었다”는 2보를 전했다.

이후 ‘과장하다’는 의미의 ‘sex up’은 켈리 게이트를 상징하는 유행어가 됐다. 영국 정부와 BBC 간에는 치열한 진위 공방이 벌어졌다. BBC가 인용한 익명의 취재원이 진실 게임의 쟁점이 되자 국방부는 “취재원은 무기 사찰 전문가인 데이비드 켈리 박사”라고 발표했다.

이후 켈리 박사는 청문회에 소환돼 의원들의 추궁에 시달리다 7월 18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항소법원 판사 브라이언 허튼 경을 위원장으로 켈리 박사 자살 조사위원회가 구성됐고 위원회는 청문회 11일째인 8월 28일 블레어 총리를 법정에 세웠다.

결국 2004년 1월 28일 발표된 허튼 보고서는 “BBC의 보도는 근거 없는 것이다. 정부는 켈리 박사의 신원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비열한 전략을 쓰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블레어 총리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BBC는 사과 방송을 내보내고 사상 처음 이사장과 사장의 동시 사임이라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블레어 총리도 켈리 게이트의 승자는 아니었다. 보고서 발표 직후 데일리텔레그래프가 영국 국민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BBC의 보도를 신뢰한다고 답한 비율은 67%인 반면 블레어 정부를 신뢰한다는 응답률은 31%에 그쳤다.

같은 해 7월 “영국 정부의 이라크 WMD 관련 정보는 심각한 결함을 가진 것이었다”는 버틀러 보고서가 발표됨으로써 이라크전 참전은 블레어 총리의 모든 공적을 가리는 그의 최대 실책으로 남게 됐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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