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소녀는 좌절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러시아 전문가로 진로를 바꾼 뒤 스탠퍼드대 부총장과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거쳐 미국 국무장관이 됐다.
콘돌리자 라이스. 그는 “나를 강하게 만든 건 인종차별의 경험”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홀로 일군 기적은 아니었다. 라이스가 백인들만 다니던 고교에서 공부하며 명문대에 진학하기까지는 교내 ‘흑백분리’에 저항했던 수많은 이의 헌신이 있었다.
라이스가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낸 미국 앨라배마 주 버밍햄은 ‘남부의 심장’으로 인종차별이 특히 심한 도시였다. 1963년 9월 10일 그곳에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흑인 학생 20명이 백인학교에 등교하게 된 것.
9년 전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는 위헌”이라는 ‘브라운 판결’이 나왔지만 남부는 인종통합의 사각지대였다.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는 백인학교 입학이 허가된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막기 위해 경찰력까지 동원했다. 존 F 케네디 정부가 주(州) 병력을 연방에 흡수시키는 극약처방을 내린 끝에 흑인 학생들은 학교 문턱을 넘어갈 수 있었다.
백인들은 맹렬히 저항했다. 10일 아침 흑인 여학생을 태운 차가 학교 정문에 들어서자 학생들은 “우리는 케네디와 검둥이를 증오한다. 우린 월리스를 원한다”고 외쳤다. 또 학생들의 등교 거부로 일부 학교 출석률은 30%대까지 떨어졌다.
우여곡절을 거쳐 1988년 무렵엔 남부 흑인 학생 중 43%가 백인학교에 다니게 됐다. 그러나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1991년 대법원이 인종분리를 막기 위해 버스 통학을 강제하던 정책을 포기하고 집 근처 학교에 다니도록 허가하면서 새로운 인종분리가 시작됐다. 빈곤층이 밀집한 도심의 공립학교는 흑인학교로, 부유층이 사는 교외 사립학교는 백인학교로 굳어진 것이다.
하버드대 연구에 따르면 흑인 학생 셋 중 한 명은 유색인종이 90%를 차지하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는 2005년 모교인 버밍햄의 브루네타 힐 초등학교를 찾아가 흑인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학교에 다니던 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여러분은 대통령도 될 수 있다.”
하지만 좀처럼 백인 짝꿍을 만날 수 없는 아이들에게 ‘제2의 라이스’는 여전히 멀기만 한 꿈이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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