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은 곧 남편이 청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다 강화도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는 소식을 듣는다. 전란이 수습된 후 부인이 친정에서 아이를 낳으니 그가 서포(西浦) 김만중(1637∼1692)이다.
그는 한글을 사랑한 조선의 선비였다. 우리 문학의 전형을 한문 문학이 아닌 국문 시가(詩歌)에서 찾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문학관을 가졌다. “자기 말로 마디와 가락을 갖추어야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까지 감동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대제학(정2품)과 대사헌(종2품) 등을 지낸 고위 관료였지만 나무를 하는 아이들이나 우물가의 여인들이 주고받는 상스러운 말에서 진심과 감동을 읽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평가했다. 특히 한자어가 적은 ‘속미인곡’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고대 국문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집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 윤 씨에게서 아버지 김익겸의 죽음을 들으며 애국자로 자랄 것을 당부 받았다. 또 당시 조선사회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부녀자들의 순절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청나라의 침탈로 인한 이런 사회 문제는 그의 애국심과 국어 사랑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가난했지만 관청의 서고에서 책을 베껴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어머니의 뒷바라지 덕분에 그는 29세의 나이에 정시 문과에 급제한다. 그러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성품 때문에 한 번의 삭탈관직과 두 번의 귀양살이를 겪게 된다.
희빈 장 씨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려는 남인(南人)들과의 정쟁에 휩쓸려 결국 1689년 남해의 노도(櫓島)로 떠난 귀양살이가 결국 ‘마지막’이 된다.
하지만 그는 가시 울타리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혹독한 귀양살이를 국문학사에 빛나는 한글 소설을 쓰는 시간으로 승화시켰다.
한글을 사랑한 그가 자신의 문집 서포만필(西浦漫筆)에 남긴 글은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고유한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말로 글을 지으니, 설령 뜻과 느낌이 비슷하다 해도 그것은 앵무새가 사람 말을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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