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선생은 잠든 모습 그대로 평온하게 영면에 들어갔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문제만큼 어떻게 생을 마감하느냐도 진지하게 고민하셨던 분이니까요.”
선생의 수하에서 문학을 배웠던 김종회 경희대 국문학과 교수는 스승에 대한 기억 한 편을 끄집어냈다.
“삶과 글에 굉장히 엄격하셨습니다.”
황순원 선생은 ‘황고집’이라 불릴 정도였다. 단 한 번의 곁눈질 없이 작가 정신 하나로 70년 문학인생을 걸었다. 식민과 분단, 전쟁과 독재로 점철된 격변의 시기에도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말한다는 원칙을 꺾지 않았다.
세속적인 욕심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학교에서 주겠다는 박사 학위도, 정부의 문화훈장도 거부할 정도였다. 문학 외의 글은 잡문(雜文)이라며 단 한 번도 원고 청탁을 받지 않았다.
미학적 극치를 시현한 그의 작가 정신은 그만큼 결벽에 가까웠다.
시에서 출발해 단편소설을 거쳐 장편소설에 이르는 그의 작품은 미학의 전범(典範)이 됐다. ‘소나기’ ‘학’ 등 단편의 서정세계와 ‘일월’ ‘움직이는 성’ 등 장편의 서사적 완결성이 대표적이다.
작가로서의 황순원은 치열했지만, 스승 황순원은 자애로웠다.
26년간 경희대 국문과 강단에 섰던 황순원 선생은 제자 군단을 거느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소설가 전상국 김용성 조세희 조해일 고원정 이혜경 박덕규 김형경 서하진, 문학평론가 신덕룡 하응백 한원균, 시인 정호승 이성부 등이 그들이다.
문학평론가 하응백 씨는 “선생님은 문학적 기술을 가르치지 않으셨어요. 선생님의 삶과 작품 자체가 문학인들의 사표(師表)였습니다”라고 전했다.
그 문하에서 걸출한 문인들이 대거 배출된 데는 이유가 있다는 얘기다.
황순원 선생은 정년퇴임을 한 뒤에도 제자들과 3개월에 한 번씩 모임을 가졌다.
“이번에 책을 낸 ○ 작가를 위해 건배∼.”
그는 눈을 감기 직전까지 제자들의 작품 활동을 일일이 챙기며 격려를 보냈다고 한다.
“선생님이 아직도 곁에 계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매년 그랬듯이 이번 7번째 기일에도 황순원 선생의 묘소를 찾는다고 했다. 문학의 스승을 찾아서….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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