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국공합작 선언. 국민당으로서는 다 잡은 ‘고기’를 놓친 셈이었지만 공산당으로서는 그야말로 기사회생이었다.
제국주의 세력과 각지의 군벌들을 타도하기 위해 쑨원(孫文)이 맺은 제1차 국공합작이 장제스(蔣介石)의 반공 쿠데타에 의해 깨진 뒤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는 치열한 내전이 벌어졌다.
1934년 국민당의 70만 대군이 대대적인 공격으로 포위망을 좁혀 오자 공산당은 1년간 1만2500km를 걷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18개의 산맥과 24개의 강을 건너며 중국 서부의 옌안(延安)에 도착했을 때 병력은 8000명에 불과했다.
고사(枯死) 직전의 공산당을 구한 것은 만주 군벌 장쉐량(張學良)과 국민당 장군 양후청(楊虎城)이었다. 이들은 1936년 12월 시안(西安)을 방문한 장제스를 체포해 감금했다.
두 사람의 요구는 단 하나,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공산당과 힘을 합치라는 것. 이들의 요구 뒤에는 대장정 기간에 공산당 쪽으로 돌아선 민심과 내전보다 항일이 더 중요하다는 대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공산당 기사회생의 계기를 만든 것은 장과 양 두 사람이었지만 이를 화려한 부활의 무대로 변모시킨 것은 저우언라이(周恩來)였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를 처형하자는 일부 강경파의 주장에 맞서 그를 풀어줄 것을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요청했다. 공산당 이외의 정치세력과 군벌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장제스뿐이며 그를 죽이면 더 큰 혼란이 온다는 것.
저우언라이는 합작을 약속하고 풀려난 장제스와 9개월간 꾸준히 합작 방안을 조율하면서 민족자본가와 지식인 계층을 끌어들이고 민중의 마음을 공산당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심지어 그는 장제스가 홍군(紅軍)을 국민당 휘하에 편입하자는 억지 주장을 펼칠 때도 동지들을 설득했다.
“동지들, 국민혁명군에 편입돼도 홍군은 사라지지 않고 이름을 바꿔도 해방구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겉치레는 양보하고 실질적인 이익을 챙깁시다.”
저우언라이의 예상은 적중했다. 7만 명의 홍군은 국공합작을 선언한 이듬해 15만 명으로 늘었다. 일본이 항복한 뒤 대다수의 민중은 부패한 국민당에 등을 돌리고 공산당을 지지했다.
1976년 ‘인민의 벗’이라고 불리던 저우언라이가 죽자 톈안먼(天安門) 광장에는 애도의 행렬이 이어졌다. 이곳에 세워진 추도비에는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며 인민과 총리의 마음이 이어졌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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