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드 마르코스. 그는 확고한 신념과 천부적인 다재다능함을 지닌 인간의 전형이었다. 1917년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마르코스는 학업은 물론 웅변의 달인이었다. 또 수영 복싱 레슬링 등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여 대학 선수권 대회에 출전할 정도였다.
살인 혐의로 옥살이를 하던 중에는 변호사 없이 혼자 법정에 나서 무죄 판결을 이끌어 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바탄에서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가까스로 풀려났지만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또다시 게릴라 부대에 지원했다.
그가 정권 교체를 통해 대통령에 선출됐을 때 필리핀은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신념과 재능은 독재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 국민이 염원했던 강력한 리더십은 장기 집권을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그는 ‘사회 경제 정치 제도의 개혁’을 명분으로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해 언론을 탄압했고, 1983년에는 야당 지도자였던 베니그노 아키노를 암살했다. 대통령 관저인 말라카냥 궁 신발장에는 부인 이멜다가 수집한 3000여 켤레의 구두가 쌓여 있었고 측근들은 부패했다. 마르코스 일가가 국고(國庫)에서 빼돌린 돈은 최대 1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대다수의 독재자처럼 마르코스도 자신만의 공적을 남기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1만6000km에 이르는 도로를 새로 깔았고, 대규모 발전(發電) 설비도 건설했다. 하지만 그의 재임 기간(1965∼1986년) 중 필리핀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4%에 불과했다.
‘피플 파워’에 밀려 권좌를 내놓은 그는 1989년 9월 28일 망명지 하와이에서 가족들만 지켜보는 가운데 고독한 죽음을 맞았다.
가장 성공한 정치인 중 한 명이었던 마르코스는 가장 실패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그를 선택했던 필리핀은 지금까지도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있다.고기정 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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