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즐거움(joie de vivre)’.
벨 에포크를 특징짓는 표현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는 게 그저 즐겁기만 했다. 2차 산업혁명 덕분에 먹고사는 형편도 나아져 더 바랄 게 없었다. 자동차, 전화 같은 신기술이 나날이 발전을 거듭했다. 문화 예술도 꽃을 피웠다.
이 시기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문화 예술이 대중 속으로 확산됐다는 점. 특히 음악의 대중화가 눈에 띄었다. 카바레(cabaret)는 그런 경향을 이끈 곳이었다. 노동자와 중산층, 귀족이 카바레의 테이블에 같이 앉아 음악과 춤을 즐겼다.
이런 태평한 분위기 속에서 1889년 10월 6일 카바레 ‘물랭루주(Moulin Rouge)’가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발치에 문을 열었다. ‘붉은 방앗간’이란 뜻. 풍차 모양의 외관 때문에 흔히 ‘빨간 풍차’로 불린다.
물랭루주를 만든 주인들은 ‘최초의 여성 궁전’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음악과 춤의 사원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장담은 맞아떨어졌다. 물랭루주는 문을 열자마자 그해 3월 센 강변에 세워진 에펠탑 못지않게 관심을 끌었다.
요란한 깃털 장식의 의상을 걸치고 신명 나게 춤을 추는 무희들을 보러 파리의 귀족, 시골뜨기 할 것 없이 모여들었다. 관객들은 특히 쇼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캉캉’에 압도당했다. 무희들은 어찌 보면 제멋대로인 것처럼 다리를 쭉쭉 들어 올리며 춤을 추었다. 춤이 저속하다는 비난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꾸준히 이곳을 찾았다. 단골이었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는 무희들과 손님들이 어울리는 물랭루주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냈다.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던 시절에도 파리지앵들은 이곳에서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로 우울한 마음을 달랬다.
물랭루주는 한때 명성이 퇴색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파리 3대 쇼’의 명소로 손꼽히며 건재하다. 초기와 비교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술과 낭만으로 넘치던 주변 거리가 지금은 누드쇼 클럽, 섹스숍 등이 늘어선 홍등가로 바뀌었다는 것.
이웃 가게들의 바가지 상흔과 우범지대 같은 분위기 때문에 이 지역에 가는 것을 꺼리는 사람도 많다. ‘아름다운 시대’는 영원히 가 버린 것일까.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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